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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58_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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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식

 1943년 2월 2일, 200여 일 동안 꿋꿋하게 버틴 소련의 적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소련에서의 전쟁은 물론 세계대전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1945년 5월 1일은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의 승전고가 울린 날이었다. 이날 예고로프 중사와 칸타리아 중사는 독일의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그 하루 전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나치 정권은 와해하고 말았다. 그리고 7일 후 독일은 소련의 주코프 장군에게 투항을 알려왔다.

 독일이 패망한 그해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들은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는 대국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회담으로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세 개 국가가 전후 처리를 의논하는 자리였다. 이는 소련의 강력한 군사적 역량을 인정받은 것이자 소련이 부담했던 책임에 대한 존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소련은 2,000만 명의 귀중한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는 대국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 독소전쟁


 소련에 대한 무장간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영국의 총리 처칠 역시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었다. 처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틀러의 무기들을 중지시킨 것은 바로 러시아 군대였다." 루스벨트 또한 다르지 않았다. "히틀러를 패망으로 내몬 것은 바로 적군과 러시아 국민이었다. 그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 국민들은 영원히 그들의 용기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할 것이다." 영국의 신문 역시 소련군의 용맹함에 대한 보도를 잊지 않았다. "역사 이래 스탈린이 이끈 군대만큼 결연하고 침착하며 두려움을 모르는 군대는 없었다. 용맹한 적군이 없었다면 자유 민족의 운명은 비극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는 소련에 있어 가장 눈부신 승리였으며 러시아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차르 러시아 시절, 러시아 민족은 변경 개척을 위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우러름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쟁에서 거둔 단 한 번의 승리로 전 세계의 존경을 받았다.

 1945년 8월 12일, 소련군의 최고 지휘자 주코프와 미국의 오성장군 아이젠하워는 붉은 광장을 가득 메운 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인류 공동의 이익 앞에서 국가와 국가 간의 협력은 무엇보다 절실했기에 최소한 이때만큼은 모스크바에서 펼쳐진 장면에 전 세계가 감동했다. 경제 공황과 전쟁을 겪으면서 세계는 평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중엽, 세계는 이들 두 대국을 중심으로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중공업을 발전시킨 이유

 스탈린은 1930년 12월에야 비로소 국가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와 침략주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던 스탈린은 1931년 2월, 정권을 잡은 지 2개월 되던 시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 "소련은 그동안 몽골인과 폴란드인을 비롯한 외부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해왔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키예프 전쟁에서 우리를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동안 그들로부터 괴롭힘과 멸시를 당해야만 했습니까? 바로, 우리의 경제가 낙후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차르 정권이 200~300년 동안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심한 매질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이 연설을 한 지 10년쯤 지난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모든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중공업 발전에 힘써냈다. 대포나 탱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국가가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1년 일본이 중국의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괴뢰 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위기는 동쪽에서만 발생한 게 아니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뒤 줄곧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치의 최종 목표가 소련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소련에는 이렇다 할 중공업은 없었다. 방위산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소련인들은 예술, 정치, 법률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전쟁 준비를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스탈린의 외자 유치 방법

 소련은 1, 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외자를 사용했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나치 집정 이전의 독일에서 외채를 빌려다 썼다. 당시 러시아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돈을 빌려 설비를 사들이고 기술자들을 고용할 방법밖엔 없었다. 그러고는 목재나, 석유, 황금, 곡물로 그 빚을 갚았다. 당시 스탈린이 했던 모든 행동은 1930년대 중반에 졌던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됐을 무렵 유럽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기에 무엇보다 자금이 절실한 스탈린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러시아에는 기계, 설비, 방직품 등이 필요했다. 스탈린은 장기 대출을 받는 동시에 대출금의 반은 황금으로 받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의 요청을 거절했다. 스탈린 이후 소련은 아주 오랫동안 외채를 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나갔다.

얄타회담
얄타회담.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소련의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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