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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미국사] 석유왕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by 티제이닷컴 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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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왕 록펠러

아마 한 번쯤은 들어봤음 직한 표현이다. 미국사라고 해서 미국 국가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록펠러 가문은 안 들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워낙 유명한 가문인데, 과연 그 시초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존 록펠러는 1937년 7월 8일에 뉴욕주 리치퍼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가정교육에 엄격했다. 아버지 윌리엄은 목재상, 농부, 모피 매매상, 소금 장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록펠러는 아버지보단 어머니의 '근검절약'을 이어받았고, '숫자만이 셀 수 있다'라는 마인드를 갖게 됐다. 록펠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상업계에 입문했다. 1858년, 열아홉 살이던 록펠러는 아버지에게 빌린 1,000달러와 자신의 800달러를 더해 동업자와 함께 곡물과 육류를 파는 회사를 차렸다. 사업에 관한 소질은 타고난 거였을까? 첫해부터 그는 4,000달러의 이익을 남겼고 그 이듬해엔 12,000달러를 남겨서 그 절반인 6,000달러를 록펠러가 챙겼다. 그 당시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석유 생산량은 자연스레 급상승했고, 록펠러 역시 관심을 갖고 조사를 했다. 하지만 록펠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마시멜로를 삼키지 않았다. 그는 곧 있으면 석유에 대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설 것을 예견했고, 머지않아 그의 예견대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섰다. 유가는 계속 떨어지게 됐고, 바로 이때 록펠러는 동업자였던 클라크와 함께 영국인 앤드루스와 동업하는 정유 공장을 지었다. 새로운 등유 추출 기술로 앤드루스-록펠러 회사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확실한 자신감이 생기면 일을 추진했던 반면 동업자인 클라크는 결코 모험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차이로 그들은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당시의 석유 시장은 질서가 잡히지 않았었고 생산은 과잉이요, 품질은 나빴었다. 이럴 때 살아남기 위해선 록펠러는 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동생을 설득해 제2의 정유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단순히 미국 국내 시장만을 노리지 않았고 처음부터 국제 시장을 노렸다. 그리하여 1870년 1월 10일에 자본금 100만 달러의 새로운 회사 '스탠더드 오일'을 창립했다. 자신의 석유가 '표준(standard)'이란 자신감을 가진 그가 성공을 못 하는 게 더 이상했다. 록펠러는 회사에 유리한 법률상 허점을 찾기 시작했고, 법률 고문인 새뮤얼 도드는 록펠러에게 '트러스트'라는 독점 조직의 개념을 제시한다. '트러스트' 이론 아래 록펠러는 전례 없는 최초의 연합 기업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1880년대에 스탠더드 오일은 석유 시장을 미국을 넘어 유럽과 아시아로 확대하고, 더 나아가 전 세계로 영역을 확대했다. 그 후 스탠더드 오일은 여러 번 이름을 바꾼 후에 '엑슨 모빌'이 되었다. 1896년 57세의 록펠러는 정식으로 은퇴했다.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서 남은 인생은 자선 사업에 매진했다. 1890년대부터 매년 기부한 금액이 100만 달러가 넘는다. 1913년에는 '록펠러재단'을 설립했다. 그의 평생 기부 금액은 5억 달러가 넘었다. 한편,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찌라시(?)의 영향으로 해산 명령을 받아 38개의 자회사로 분리되었고, 이 회사들이 지금까지도 미국 산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37년 5월 23일 록펠러는 눈을 감았다. 록펠러 가문은 지금까지도 본인들도 정확히 모를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록펠러
석유왕 존 D 록펠러.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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