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 또 증세
존 왕은 잉글랜드에서 차츰 군비를 확대하고 임의로 세수를 늘리는가 하면, 귀족들의 영지를 자기 재산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봉건적 규범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기록에 따르면, 존 왕은 이때 병역면제세를 16배, 귀족들의 영지상속세를 100배나 올리고 동산에 대한 세금은 배로 늘렸다고 한다. 그는 또 상업세를 신설해 모든 수출입 화물의 가치에 따라 그 15분의 1을 세금으로 물리기도 했다.
교회도 더 이상 성역은 아니었다. 존 왕은 교회에까지 손을 뻗쳐 1209~1211년의 3년 동안 교회 수입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이 2만 8,000파운드에 달했다. 소, 양, 보리의 값도 배 이상 껑충 뛰었다. 이것이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인플레이션일 것이다.
이렇듯 갈수록 세금은 늘어나고 신설되는 데다 자산 수탈까지 심해지자 잉글랜드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존 왕의 이런 행위는 국왕과 귀족 간의 불문율을 파기하는 것으로서 이미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존 왕 vs 귀족
귀족들은 법과 관습을 무시한 국왕의 전횡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214년 1월, 존 왕은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결심하지만 휘하의 기사들은 왕에 대한 믿음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해 7월 27일, 존 왕은 부빈 전투에서 참패당했고,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고자 하는 희망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프랑스 원정까지 실패로 돌아가자 국왕에게 완전히 실망한 귀족들은 더 이상 실정만 거듭하는 국왕을 따라 수렁에 빠지기를 원치 않았다.
1215년 1월 6일, 귀족들의 인내심은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다. 런던에서 개최된 제1차 회의에서 귀족들은 존 왕에게 자유헌장의 회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존 왕은 이를 다음 회의로 미루며 시간을 끄는 한편, 병역면제세를 내라고 종용했다.
자유헌장
1100년, 헨리 1세가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관식에서 발표한 헌장이다. 부당한 과세나 악법을 폐지하고 선대왕들의 권력 남용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귀족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며 맞섰다. 이들은 분노와 실망감에 휩싸여 영지로 돌아간 후, 무력으로라도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로 결심을 굳혔다.
국왕과 귀족들 간의 균형 관계는 한두 번 깨진 게 아니었다. 영국 초기 역사부터 쌍방의 권리와 의무 계약은 항상 국왕 쪽에서 파기했다. 왕이 자신의 권익을 확대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면, 귀족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 국왕과 귀족 간의 전쟁을 통해 다시 한번 상호 균형을 이루는 계기가 마련되곤 했다.
영국 역사에서 이러한 국왕과 귀족들 간의 전쟁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마그나 카르타'의 기초가 마련되고, 또 특별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된 곳이다.
1215년 봄에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의 지지를 얻게 된 귀족들은 같은 해 5월, 무장을 갖추고 국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이유는 국왕이 신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례보다 더 많은 권력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사태는 급진전하여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 그리고 런던 주변 지역에서 시작된 귀족들의 반란은 사회 각 계층으로 확산하여 나갔다. 귀족에서부터 수도사와 시민들까지 반란 세력에 가세하자 국왕은 외국 용병을 고용해 왕궁을 지켜야 할 만큼 수세에 몰렸다.
그해 6월, 무장한 반란 세력은 런던에 도착해 국왕이 기거하는 윈저성을 포위한 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최후의 결전이 코앞에 닥치자 용병들은 모두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존 왕은 고작 7명의 기사만이 남은 성안에 갇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다. 다급해진 그는 결국 반란 세력에게 휴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마그나 카르타
반란 귀족들은 그대로 밀어붙여 국왕의 목을 베어버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국왕의 목을 베는 대신 새로운 계약을 맺기로 협의했다. 이는 바로 영국 사회의 전통적인 관념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반란자들이 존 왕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자신의 권익을 보장받고 싶었을 뿐, 왕실에 대항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능한 왕을 제거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 왕좌에 세울 또 다른 왕위계승자를 찾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들은 곧 존 왕의 항복을 받아들였고, 강령의 성격을 띠는 문서에 국왕의 서명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았다.
'역사학 > 영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10_존 왕의 죽음과 <마그나 카르타>의 이모저모(1) (0) | 2024.06.22 |
---|---|
[영국]#9_영국 정치의 정체성을 확립한 <마그나 카르타> (0) | 2024.06.21 |
[영국]#7_실지왕(Lackland) 존, 영국의 왕이 되다 (0) | 2024.06.19 |
[영국]#6_'둠즈데이북', 더 많고 확실한 세금을 거두기 위해 토지를 정리하다 (0) | 2024.06.18 |
[영국]#5_윌리엄 1세와 솔즈베리 서약 (0) | 2024.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