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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25_메이지 유신, 계몽의 서막

by 티제이닷컴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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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6년(1873년), 역사적으로 유명한 계몽 학술 단체인 '명육사'가 탄생했다. 그해 7일, 미국 주재 일본 공사 모리 아리노리가 귀국한 후 문학계 및 교육계 유명 인사들을 주축으로 학술 단체를 조직하고 문명개화 정책을 추진할 것을 건의했다.

메이지유신 계몽운동

 니시무라 시게키의 노력으로, 츠다 마미치와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가토 히로유키, 미쓰쿠리 린쇼, 미쓰쿠리 슈헤이, 스기 고지,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제일의 서양학자들이 학술 단체 조직에 대해 지지의 뜻을 밝혔다. 9월, 비로소 명육사가 설립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대표로 추대되었지만 그가 고사하여 스기 고지가 초대 대표가 되었다. 이듬해 3월, '명육잡지'가 발간되었다. 니시무라 시게키는 창간호의 창간 취지문에서 "일본의 학술 문예 결사는 바로 오늘 시작되었습니다. 명육사에 참여한 분들 모두 탁월한 논리로 뛰어난 글을 써주실 것입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탁월한 고견이 우매한 백성들을 일깨우고 세상의 모범이 되어 지식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이 잡지는 총 43호까지 발간되면서 100편이 넘는 논문을 게재했으며 논문의 내용도 매우 광범위했다. 유명 인사들의 논문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명육사 회원들은 수많은 서양 저작물들을 번역해 서양의 민주 공화 사상을 소개했다. 또 서양의 사회과학 용어들을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이 용어들은 훗날 한국과 중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니시 아마네는 처음으로 영어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사람이다.

일본의 볼테르, '후쿠자와 유키치'

 이 시기는 훗날 일본 역사에서 사상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시기로 기록되었다. 모리 아리노리는 주미 공사로 있던 시기에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명성을 듣고, 그가 일본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1872년에 '권학편'을 발표해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 나라가 독립하려면 신체가 독립해야 하고, 신체가 독립하려면 배움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사람은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으며 근면하게 배워서 사물을 잘 아는 사람이 귀인이고 부자이며, 배우지 않으면 빈자이자 천인이 된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또 그는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을 배척하고, 실생활에 쓰일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부 인권의 관념에 입각하여 봉건적인 도덕 윤리를 비난하고 인간의 평등함을 천명했다. 이 책은 80만 부나 발행되어 그의 전작이었던 '서양사정'의 기록을 뛰어넘으며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했다.

 '권학편' 제1편이 출간된 시기에 마침 일본에서 신학제가 발표되었는데, 이 사상이 신학제의 제정에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는 도쿄의 시나가와구에서 게이오 의숙(게이오대학의 전신)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타에 있어 '미타의 문부성'이라 고 불리기도 했다. 1885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또다시 '문명론개략'을 발표하여 서양 문명의 선진성과 일본 문명의 낙후성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일본인들에게 근대 문명화를 이룩해 일본 문명을 서양 문명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훗날 메이지 초기 일본 문명개화의 경전으로 평가되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볼테르'라고 불리게 된다. *오늘날 일본의 1만 엔짜리 지폐에도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 2024년 7월부터는 1만 엔 초상화가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변경된다)

 

[일본 근현대사]#번외_'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70세가 되도록 수많은 사업을 경영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으며, 자본주의의 기본인 이윤 추구를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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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몇몇 사상가들이 전파한 서양의 자유 사상이 젊은 층을 파고들어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번역한 영국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젊은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권학편'과 함께 학교 교과서로 채택되기도 했다. 계몽사상 전파는 훗날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의 주된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으며, 1870년대 중기부터는 자유 민권 운동이 점차 발전해 메이지 초기의 중요한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의 볼테르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1만엔권의 모델이다
1만엔 지폐의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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