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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29_근대 천황제 확립, 메이지 유신

by 티제이닷컴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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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는 제헌 대권을 장악하고, 점진적인 제헌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1882년에 독일을 방문해 1년 넘게 독일 헌법 제정을 연구한 바 있는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식 헌법 제정을 모델로 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하고는 "일본 천황의 이익 차원에서 본다면 국회 소집은 축하할 일이 아니오. 부득이하게 국회를 설립했다고 해도, 헌법에 정부의 예산은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할 필요는 없소. 선생은 국회가 예산을 비준하지 않을 경우의 해결책을 준비해 놓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는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는 일본 헌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유신 3걸, 오쿠보 도시미치 살해되다


1878년 5월 14일 새벽 6시, 오쿠보 도시미치가 자신의 사저에서 후쿠시마현 현령인 야마요시 모리노리를 만났다. 야마요시는 도쿄에서 열린 지방관 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중이었다.

 야마요시 모리노리가 8시가 다 되어갈 때쯤 하직 인사를 하자, 오쿠보 도시미치는 출근하기엔 아직 이르다며 그를 붙잡아놓고 앞으로의 정치 방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상황이 점차 안정되고 있소. 안정기가 30년 동안은 계속될 것이오. 메이지 원년부터 10년까지 첫 번째 시기는 군사 위주의 성립 단계였지만, 11년부터 20년까지 두 번째 시기는 내정을 안정시키고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요.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내무경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로 결심했소. 20년부터 30년까지 세 번째 시기는 번영을 유지하는 단계인데, 이때를 위해 인재들을 계속 양성해야 하오. 그래서 난 두 번째 시기에 해야 할 일들을 신중하게 수행하는 한편, 장차 이 성과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놓을 생각이오."라고 말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야마요시 모리노리를 보낸 후, 쌍두마차를 타고 임시 황궁인 아카사카에 있는 태정관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객 6명이 마차를 습격해 그를 살해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살해한 자객 6명은 곧장 임시 황궁으로 가서 자수하고, '천황에게 올리는 글'을 통해 번벌 정치가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위로는 천황의 조서에 따르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민권에 탄압을 자행하고 정치를 사유화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유사전제의 상황을 개혁하고 민회를 열어 대중의 여론을 들을 것을 주장했다. 정부는 이들 6명에게 참수형을 내리고, 9일 후에는 기도 다카요시 아들과 오쿠보 도시미치 아들에게 화족 신분을 허락해 주었다.

 1878년에 오쿠보 도시미치가 죽기 1년 전인 1877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도 다카요시가 이미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1년 사이에 '유신 3걸'이라 불리는 인물들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떠난 것이다.


근대 천황제의 확립


 1877년, 천황의 순행을 수행해 아오모리현에 온 이와쿠라 도모미는 숙소에서 작은 연회를 열고 기도 다카요시를 초청해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시국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와쿠라는 유신 이래로 대신들의 교체가 잦아 시장 방침이 자주 바뀌는 것에 걱정을 표했다. 기도 다카요시는 일본에 곧 입헌 제도가 실시되고 국회가 설치될 것인데, 천황의 권위가 약해 농민 중에는 천황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황실의 경제력이 약한 것을 우려했다. 그는 "자고로 지위라는 것은 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라고 말하며 천황이 강한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황실과 궁내성의 경비를 분리해 황실의 재산을 늘리고자 했다. 그 후로 10여년간 대신들이 천황의 부를 축적해 주기 위해 힘을 쏟는다. 그 결과, 1889년 황실이 헌법을 반포할 당시 보유한 주식은 974만 엔화로 천황과 황실이 일본 최대 지주이자 자본가였다. 1888년, 정부는 새로 지은 황궁을 큐조라고 명명한다. 1889년 메이지 천황은 정부를 자신이 특별히 세운 큐조로 이동시켰다.

 기도 다카요시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시찰할 때 이미 일본의 다음 국가 체제를 구상했다. 그는 일본의 현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본 거리의 현대화'에 그쳐 겉으로 서양 문명을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농촌을 비롯한 기타 지역은 실제로 현대화가 전혀 실시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다음 단계의 개혁을 구상하고 있을 때, 불행하게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로써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제2대 지도자의 시대로 들어선다. 이와 동시에 제2차 유신도 실시되었다.

청년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청년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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