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기 위해 제1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가 무쓰 무네미쓰의 계책을 받아들여 도쿄에 로쿠메이칸(메이지 시대 외국인 접대소)을 건립하고 서양 인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어 일본 서구화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1883년 준공된 로쿠메이칸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당시 일본의 주요 정치인과 외국 사절들이 연회를 열고 친분을 다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 와중에 이토 히로부미는 주색을 일삼으며 음탕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시기를 일본인들은 '로쿠메이칸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약 수정을 위한 비밀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협상에 실패하자, 오쿠마 시게노부가 그 뒤를 이어 협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협상이 거의 타결되려는 때에 영국의 '타임스'가 오쿠마 시게노부가 최고법원에 외국인 법관을 초빙하겠다는 것을 협상 카드로 내걸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본의 여론은 들끓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결국 자객의 습격을 받아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1893년, 국제 정세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자 일본은 이 틈을 타 오랫동안 염원하던 조약 수정을 실현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포르투갈이 국내 이슈를 이유로 주일 총영사관을 폐쇄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해 영사 재판권을 회수했다. 그러자 세계 최고 강대국인 영국도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일본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진행하던 영국은 동아시아를 놓고 러시아와 경쟁이 치열해지자,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일본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려는 속셈이었다.
러시아는 1885년에 황제 알렉산더 2세의 명령으로 서부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891년에 철도가 완공되었고, 영국은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를 견제할 필요가 생겼다. 당시 일본도 대륙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무쓰 무네미쓰를 보내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국내에서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의회에서 내각 탄핵을 제기한 것이다. 바로 이때 조선 정부가 농민 봉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일본 국내 여론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조선에 대한 출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하늘이 날 도왔구나!"라고 외쳤다고 한다.
조선 출병으로 영일 협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영국이 드디어 양보하여 일본과 양국이 서로 양보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해야만 했다. 그러니 영국은 일본이 러시아는 물론, 영원한 라이벌인 프랑스와도 동맹을 맺길 원치 않았다. 또한 동북아에서 영국이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일본이 도와주기를 기대했다. 영국은 5년 후 영사 재판권을 취소하고 일본의 관세 인상에 동의했다.
영국은 당시 대영제국으로 세계를 휘어잡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이를 계기로 반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득은 당장 코앞에 닥친 청일전쟁에서 든든한 아군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육·해군이 출전하기 전에 전쟁을 회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일본은 사태를 계속 격화했다. 그들의 목표는 전쟁 도발이었다.
청일전쟁 발발, 조선을 차지하라
1894년 7월 25일, 일본군이 조선의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습격하고, 대동구에서 이송하던 청군의 배를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청일전쟁의 막이 올랐다. 전쟁 초기부터 일본군은 거침없는 기세로 청나라에 공격을 퍼부었다. 9월 16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육군 제1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10월에는 중국 동북부로 침입했다. 해군은 9월 17일 이토 스케유키의 지휘 아래 서해에서 북양 수사를 격파하고, 보하이 만과 서해를 통제권에 편입했다. 베이징과 즈리로 들어가는 관문이 일본에게 활짝 열린 셈이었다.
11월에는 요야마 이와오가 지휘하는 육군 제2군이 뤼순을 점령했다. 뤼순을 공격한 일본군은 대학살을 자행해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뤼순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투입된 병사 36명뿐이었다. 미국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 보도하면서 "일본은 문명의 탈을 쓴 야만적 괴수다. 일본은 이제 문명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야만스러운 참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라고 논평했다.
1895년 2월, 일본군이 즈리를 공격하려던 작전 목표를 수정해 웨이하이웨이를 공격해 북양 수사를 전멸시켰다. 정여창은 이 전투에 패배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본은 승리의 기미가 보이자 청과의 협상에서 최대한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외상 무쓰 무네미쓰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 인정과 토지 할양 및 배상금 지급, 불평등 조약 체결이라는 3대 원칙을 제출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열강들이 간섭할 것을 우려해 각료들에게 이 원칙을 비밀에 부칠 것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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