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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43_일본, 조선을 삼키다

by 티제이닷컴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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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이후 일본, 조선을 삼키다

 1905년 11월 16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방문해 '한일 협약(을사늑약)'을 고종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 달라고 공공연하게 요구했다. 그는 외무대신을 만나 서둘러 일본 공사와 협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한 뒤, 18일 새벽 0시 20분 일본 헌병들의 경호를 받으며 거처에 도착했다. 약 30분 뒤,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조선의 박제순이 한일 협약에 서명했다. 일본은 조선에 통감을 설치하고 주둔해 외교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의 동의를 받지 않고는 그 어떤 국제 협약도 체결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한다. 그는 한국을 13도 11부 333군으로 나누고 각급 행정 기관에 일본인을 상주시켜 엄격한 식민 통치 구조를 수립했다. 조선의 삼천리강산이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했다.

 1907년 7월, 러시아와 일본이 협정을 체결했다. 비밀 협약의 내용 중에는 러일 양국이 만주 남부와 북부의 경계선을 설정하고는 정식으로 세력 범위를 확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 밀약으로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을 자유롭게 침략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일본은 러시아가 중국 외몽골에서 권력을 확장하는 걸 묵인해 주기로 한다. 게다가 일본은 이미 조선의 고종을 퇴위시키고 세자를 왕위에 올려놓은 후 강압적으로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통제권 아래에 놓인 식민지 신세가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 기차역, 러시아 재무대신이 성대한 환영식을 개최하고 군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려와 러시아 군대를 사열했다. "만세!" 소리가 하얼빈 역에 울려 퍼지며, 이토 히로부미는 환영하러 나온 일본 교민들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환영하는 인파 속에서 뛰어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구를 겨눠 총알을 발사했다. 총알 세 발이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진통을 위한 브랜디 두 잔을 마신 후 조선 의사의 손에 숨을 거두었다. 조선과 중국 침략의 원흉에 걸맞은 말로였다. 이 거사를 치른 이가 바로 안중근 의사였다. 그는 21세기인 지금에 이르러서도 한국과 중국에서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1910년 8월, 일본이 조선을 공식적으로 장악했다. 그리고 1912년,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죽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인

 메이지 유신에서 러일전쟁에 이르는 동안 일본의 개혁은 이미 성공했으며, 개혁 성공 지표가 바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였다.

 중국과 일본 관계의 분수령은 청일전쟁이었다. 사실 일본은 그럴만한 실력이 아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점령하고 중국 동북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랴오둥반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은 이홍장이 조인한 것으로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는 대신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과 영국의 개입으로 중국은 랴오둥반도를 되찾았지만, 서구 열강 역시 그곳에 식민지를 수립했다.

 러일전쟁에서 미국과 영국은 각자가 가진 목적을 위해 일본을 지원했다. 당시 국제 사회에서는 영국과 러시아의 땅따먹기인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이었다.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필요성을 느끼고 아시아에서 협력자를 물색한다. 당연, 그 자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에 성공했던 일본이었으며, 그 이유로 일본과 협력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미국도 중국 동북 철도의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과 협상해야 했다.

 러일전쟁의 승리에 일본의 운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서유럽 국가들은 일본이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 원조를 해주었다.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 조약을 체결했는데,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와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일본은 이미 영국, 미국과 함께 세계 3대 강국으로서 자국의 군사력으로 전쟁에 승리했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두 나라와는 결이 다른 군국주의 노선이었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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