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월 18일, 중국 선양 북부 류탸오거우에서 관동군 독립수비대의 고모토 스에모리 중위가 사병 6명을 데리고 남만 철도 선로 위에 황색 폭약 42포를 설치했다. 얼마 후 굉음과 함께 철로가 폭파되었다. 이 일은 중국 군대를 모함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9.18 만주사변
얼마 후, 4킬로미터 밖에 매복해 있던 카와시마 타다시 대위가 중국 군대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는 일본군이 이미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규모 행동으로,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9월 19일, 안둥, 잉커우, 창춘, 펑황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장제스의 훈령에 따라 장쉐량은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자기들 목숨 부지하는 게 최우선이어서 도망가기 바빴다. 불과 4개월 동안 일본은 산해관에서 헤이룽장에 이르는, 일본 국토 3배에 달하는 110만 평방킬로미터 영토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1932년 1월 24일, 일본 순양함과 항공모함 11척이 황푸강에 집결한다. 그러고 나서 나흘 후, 상하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가 지휘하는 19로군이 일본군과 필사의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전쟁을 도발한 것은 사실 중국 동북부에 쏠린 서구 열강 관심을 분산하기 위해서였다. 9.18 만주사변이 일어난 다음 날 사변의 주모자인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이시와라 간지, 참모본부의 다테카와 요시쓰구는 중국 동북부 통치 계획을 논의했다. 관동군은 동북 3성을 직접 합병해 일본 영토로 삼으려 했지만, 도쿄에서 온 다테카와 요시쓰구는 괴뢰 정부를 수립하여 실제로는 일본 정부가 통치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관동군도 객관적인 정세를 고려해 다테카와의 주장에 동의하고 우선 만주를 독립시키기로 했다.
1932년 3월 10일, 창춘의 옛 도윤아문에서 위만주국 성립 기념식이 거행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황제로 등극했다. 그해 9월 13일, '일만 협정서'가 일본 추밀원에 제출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직접 주재한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9월 15일, 일본이 정식으로 위만주국을 승인하자, 중국 동북부는 새로운 형태의 일본 식민지로 전락했다.
1933년 1월 16일, 국제 연맹의 19개국 회의가 부활했다. 일본은 위원회가 만주사변에 간섭할 수 없다고 확고한 입장을 밝혔지만, 회의에서 일본이 중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도발하고 영토를 분열시켰다고 규정하고 일본에 철군을 요구했다. 결국 위만주국은 일본을 제외한 어느 나라에도 정식 국가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일본은 국제무대에서 고립된 것에 대한 반발로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다.
무력으로 동북 3성을 점령한 일본은 러허성을 빼앗고, 화베이와 네이멍구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친일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른바 '자치 운동'이라는 것을 전개했는데, 실제 속셈은 화베이를 넘어 중국 전체를 독점하려는 데 있었다.
1935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하고 전 세계를 뒤흔든 시안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일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사태의 추이만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언제든지 무력으로 간섭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중국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해 어부지리로 중국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일본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시안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자 오히려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공공의 적인 일본을 타도하자며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중국엔 제2차 국공합작이 진행되었다.
시안사건
1936년 12월 12일 당시 만주에서 동북 군을 이끌고 있던 군벌 장쉐량과 국민당 장군 양후청이 장제스를 체포 구류함으로써 공산당과 국민당이 힘을 합쳐 일본에 투쟁한다는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를 만든 사건이다.
제2차 국공합작
2차 국공합작으로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당은 여태 불법 취급한 공산당을 합법화한다. 중국 대중의 민심을 읽지 못했던 장제스는 여론을 끌어당기기 위해 공산당과 합작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협력으로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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