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4 [러시아사]#40_피의 일요일 사건, 러시아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다 피의 일요일 사건 1905년, 러시아와 일본이 중국에서 러일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였다. 러시아 내에서는 혁명의 조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1월 22일 일요일, 새벽부터 눈보라가 휘날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15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노인과 아이들을 대동하고 나와 겨울궁전을 향해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청원서와 니콜라이 2세(재위 1895-1917)의 초상화를 들고 동방정교의 찬송가를 부르며 국민 대표제, 8시간 노동권, 의무 교육, 임금 인상, 작업 환경 개선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손에 무기 하나 쥐지 않은 그들을 기다린 것은 황제의 웃는 얼굴이 아니라 총성과 차디찬 말발굽 소리뿐이었다. 경찰과 군대는 이 평화적 행진에 발포를 시작했고, 그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는 노동자의 피로 .. 2024. 2. 12. [일본 근현대사]#43_일본, 조선을 삼키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조선을 삼키다 1905년 11월 16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방문해 '한일 협약(을사늑약)'을 고종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 달라고 공공연하게 요구했다. 그는 외무대신을 만나 서둘러 일본 공사와 협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한 뒤, 18일 새벽 0시 20분 일본 헌병들의 경호를 받으며 거처에 도착했다. 약 30분 뒤,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조선의 박제순이 한일 협약에 서명했다. 일본은 조선에 통감을 설치하고 주둔해 외교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의 동의를 받지 않고는 그 어떤 국제 협약도 체결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한다. 그는 한국을 13도 11부 333군으로 나누고 각급 행정 기관에 .. 2024. 1. 16. [일본 근현대사]#42_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 본심을 보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로부터 그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이때 영일 협상이 진전을 거두어,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영국으로 가서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가 한반도를 손에 넣는 것을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러일전쟁 발발 영일 동맹이 러시아를 압박하자, 러시아는 같은 해 청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고, 1년 반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자국의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03년, 러시아가 갑자기 철군에 대한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동북 3성을 점령하는 것 외에도 외몽골과 중국 북부 지역 전체를 자국의 영향권 내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은 러시아에 강하게 반대하도록 청나라 정부를 부추겼다. 일.. 2024. 1. 15. [일본 근현대사]#41_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러일전쟁의 조짐 [일본 근현대사]#40_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 근현대사]#39_청일전쟁 발발. 일본, 조선을 탐내다 구미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기 위해 제1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가 무쓰 무네미쓰의 계책을 받아들여 도 readmyworld.tistory.com 일본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자, 더욱 특이한 병태적 심리에 빠져 군국주의의 바람이 점점 드세졌다. 이른바 '와신상담'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전 국민에게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전후 처리에 주력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일본은 러시아와 중국, 조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일본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 입장에.. 2024. 1. 15.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