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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4

[일본 근현대사]#47_난징 대학살과 태평양전쟁 발발 1937년, 표면적으로는 중·일 관계가 매우 평온한 것처럼 보였지만, 4월부터 일본군이 핑진(현재 베이징과 톈진) 근교에서 군사훈련을 시작하였으며, 6월에는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내부에서 군대의 이동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난징 대학살,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 일본 도쿄 정치계의 소식통 사이에서는 칠석날 밤에 화베이에서 9.18 만주사변과 같은 사건이 재연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같은 해 7월 초,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가 중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천황이 소련 군대가 걱정이라고 말하자, 스기야마 하지메는 "중국과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2~3개월이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한 .. 2024. 1. 22.
[일본 근현대사]#45_대공황과 군국주의 길을 걷는 일본 1921년, 미국 정부가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9개국을 초청해 워싱턴에서 회의를 열고, 일본에 강한 공세를 펼쳤다. 미국은 일본에 해군의 군비 확장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과 영국, 일본이 각각 5:5:3의 비율을 유지하기로 합의해, 일본 주력 군함의 규모는 영국과 미국보다 21만 톤 적은 31만 톤을 넘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 문제에 있어서 미국은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중국이 요구한 영사 재판권 취소와 관세 자유 실현, 조계지 반환 등의 요구와 산둥 문제 해결, 1915년에 체결된 21개조 요구 폐지 등의 조건은 일본이 배상금을 받고 산둥에서 철군하기로 합의하는 데 그쳤다.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동북아에 새로운 정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영일 .. 2024. 1. 17.
[일본 근현대사]#36_메이지 헌법, 향후 일본 파시즘의 근원이 되다 제국 헌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천황과 군대에 관한 규정이다. 이것은 일본이 침략 전쟁을 도발하도록 하여 아시아와 세계에 크나큰 재앙을 안겨주었다. 결국 일본 제국을 철저히 패망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헌법 규정에 따르면, 육·해군의 통솔과 편제 그리고 병력을 결정하는 권한은 순전히 천황에게 있고 의회나 내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군대 통솔권이 독립적이고 군부가 천황의 직속 기관이기 때문에 군부의 권력이 막강해 심지어는 내각과 의회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천황의 자문기관인 원수부와 군사 참의원은 원수와 육·해군 대신,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으로 구성되어 완전히 군부의 세력에 속했는데, 군부의 의견을 천황에게 전달하는 권리를 가졌다. 따라서 대권을 좌우하고 내각 통제와 정부의 대내외 정책에.. 2024. 1. 10.
[일본 근현대사]#15_메이지유신 군제 개혁, 군국주의의 길을 걷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유럽과 미국의 군제를 견학하던 시기에 때마침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 결과, 약소국이었던 프로이센이 승리하며 프랑스에 영토 할양과 배상금을 요구했다. 비스마르크와 독일 황제는 그들의 영토에서가 아닌,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건국 기념식을 거행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강한 군사력과 군대 조직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정했다. 일본이 따라야 할 군사 체제는 프로이센이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 정부가 통솔하는 제국 군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군제 개혁에 바람이 불다 1870년 8월 3일, 유럽과 미국의 군제를 시찰하고 귀국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사이고 쓰구미치가 메이지 .. 2023.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