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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48_크론시타트 반란과 신경제 정책

by 티제이닷컴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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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볼셰비키 정권이 백군을 물리침으로써 러시아의 내전은 종결됐다.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인들은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평화롭던 일상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견디기 힘든 시련인 것처럼 전쟁에서 다시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전쟁이 일어나던 순간부터 모든 것은 전쟁 위주로 돌아갔고 승리 후에는 다음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이렇게 굳어진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발전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크론시타트 반란

크론시타트 반란
 내전이 끝난 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해군 기지에서 해병들이 일으킨 반정부 반란 사건이다. 발트 함대의 주력 기지였던 크론시타트에서 일어난 이 반란은 공산당 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공산당이 전시 공산주의에서 신경제 정책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 중 보여주었던 정책의 위력 덕분에 소비에트 연방은 계속해서 전시 공산주의를 시행하기로 했다. 레닌을 포함한 많은 사람은 이 정책을 통해 러시아가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와 강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전쟁 종결 1년 후인 1921년 봄, 러시아에는 봄의 위기가 찾아왔다. 러시아 전국이 기근에 빠졌고,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식량 징발제에 반대하기 위해 농민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었고, 크론시타트의 해병들은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10월 혁명 당시 볼셰비키의 가장 튼튼한 바람막이였던 크론시타트가 이제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러시아의 위기, 특히 크론시타트 반란을 보며 레닌은 도대체 무엇이 볼셰비키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들을 돌아서게 했는지 깊은 고민에 잠겼다. 레닌은 민중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가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 농민들은 레닌에게 이런 불만들을 털어놓았다.

 "토지는 우리 것이지만 빵은 당신들 것입니다. 물은 우리 것이지만 물고기는 당신들 것이지요. 숲은 우리 것이지만 목재는 당신들 것 아닌가요?"
 "게으른 사람이나 근면한 사람이나 배급받는 식량은 모두 같아요.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도대체 이 정책의 장점은 뭡니까?"
 "징발되는 식량의 양이 너무 많아요. 기준을 정해주십시오. 아니면 밭에 뿌릴 종자를 모두 먹어 치울 겁니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느냐고요? 간단한 거 아닙니까? 비율에 따라 식량을 징발하면 되죠."


농민들의 빈곤한 현실과 신경제 정책

 농민들의 이야기는 레닌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말처럼 전시 공산주의의 식량 징발제는 생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적극적인 의지를 깎아내렸다. 농민들은 굳이 식량 생산량을 늘리려 하지 않았고, 어떤 농민들은 곡식이 다 여문 밭을 갈아엎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는 것이 강제로 징발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레닌은 말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대가가 얼마 되지 않았던 농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생활을 이해하기 때문에 농민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농민들이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레닌은 자기 잘못을 솔직히 인정했다. "우리의 경제 정책이 러시아의 하위 계층과 맞지 않았던 것이 실패한 원인이었다. 우리는 생산력을 높이지 못했다. 생산력 제고는 당의 강령이며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음에도 말이다."

 새롭게 탄생한 러시아가 아주 중요한 시험에 놓여 있으며 하루빨리 답안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식량 징발제를 시행해 나갈 수 없다. 이 정책은 벌써 바뀌었어야 했다. 우리는 어쩌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당을 4년제 고등학교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지금 4학년으로 가기 위한 승급 시험을 치르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이 찾은 답안은 바로 신경제 정책이었다. 1921년 3월부터 시행된 신경제 정책은 우선 농민 문제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다. 식량 징발제를 없애고 식량세를 시행했는데 식량세를 납부하고 남은 식량은 모두 농민들 스스로 나눠 갖도록 했다. 농민들은 식량세에 환호했다.

크론시타트 반란
크론시타트를 공격하는 노동 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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