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 이후의 행보
러시아의 민족들이 10월 혁명 이후 5년이나 고난의 투쟁을 하며 선진 공업 국가의 침략과 간섭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승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은 평등과 정의,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 제도에 대한 갈망이었다.
10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의 정권은 소비에트로, 평화와 토지는 국민들에게로 돌아갔다. 혁명 이틀째, 소비에트는 첫 번째 법령인 평화 법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을 통해 교전 중인 국가에 평화 협정을 제안하면서 영토 할양과 배상을 하지 않는 방안을 함께 제안했다. 두 번째로 공포한 것은 토지에 관한 법령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토지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 노동량과 소비량에 맞추어 노동자에게 토지를 지급했다. 러시아 국민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상황은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소비에트 연방과 독일, 오스트리아 간의 평화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독일이 폴란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의 일부 지역 및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이 살고 있는 영토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닌은 이 굴욕적인 평화 협약에 서명할 것을 주장했다. 피로가 누적된 러시아 군대와 이미 붕괴 위기에 놓인 러시아 경제는 더 이상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레닌의 주장에 반감을 표했다. 이에 따라 레닌은 처음으로 동지들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918년 2월 24일, 당시 가장 중요한 지방 정당이었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모스크바 지부는 중앙의 정치 노선과 중앙 위원들에 대한 불신임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하며 중앙당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소비에트 내에서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독일의 첩자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곧 당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레닌의 의견은 부결됐다. 그러자 독일은 곧바로 공격 의사를 밝혀왔다. 페트로그라드의 위기이자 소비에트의 위기가 코앞으로 닥쳐왔다. 다시 한번 회의를 연 당 중앙과 소비에트는 이번에는 레닌의 제안을 받아들여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1918년 3월 3일, 소비에트 정부가 제1차 세계대전 중의 교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터키 등과 체결한 단독 강화 조약
이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는 대규모의 영토를 잃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에서 벗어나 정권을 정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역사는 레닌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소비에트 정부는 즉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무효로 했다.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던 레닌은 그로 인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단체의 지도자로서 구성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했던 그의 면모는 뛰어난 정치가의 자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레닌과 마르크스주의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떠한 것이 시작된 시점을 정확히 아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레닌은 아마도 자기 형이 교수형을 당하던 때부터 마르크스 이론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혁명가 플레하노프의 영향도 있다. 플레하노프는 19세기 말 무렵 러시아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조직을 이끈 사람이다.
플레하노프가 이끄는 조직의 한 여성 조직원은 마르크스에게 편지를 써서 공업 및 노동자 계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주의 혁명 이론이 러시아에서도 실현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에 대한 마르크스의 대답은 "불가능하다."였다.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 계층을 기반으로 하므로 산업이 발달한 유럽 선진국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레닌은 이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왜 한번 해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는 걸까? 먼저 러시아 내에 혁명의 환경을 조성한 다음 국민, 즉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라는 게 레닌이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농업 전문가 레닌
레닌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업 전문가였다. 그는 농민 생활의 전문가이자 이론가였으며, 실천가이기도 했다. 레닌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러시아가 농업 국가이자 황폐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로 군중을 선진 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농민들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닌과 농민들 사이에 여러 가지 미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의 기초가 바로 농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실제로 시행됐던 농업 정책은 레닌의 의견과는 매우 달랐다. 레닌이 말년에 쓴 저서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성급하게 진행되는 농업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한편 그는 농민의 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기도 했다. 물론, 이 조직이 농업 집단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말한 협동조합은 농민 연합 같은 거였다. 상품 판매 협동조합과 토지와 기술사용 협동조합을 조직한 다음 정치적 노선에 관한 협동조합도 만드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레닌은 농업 집단화가 빨리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고 이에 따라 러시아에는 추운 겨울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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