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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44_러시아혁명 이전, 점점 커져가는 볼셰비키 세력

by 티제이닷컴 2024.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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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혜안

 사실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레닌을 지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창간한 '프라우다'(진리라는 뜻의 공산당 기관지)에서도 임시 정부에 대한 태도는 모호했다.

 어쩌면 이처럼 역사가 베일을 벗기 전에 그 모습을 파악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역사가 가진 가장 매력적인 점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가 닥치면 그저 조급한 마음으로 역사의 결정을 기다린다. 또한 한편으로는 남다른 안목을 가진 이를 비웃으면서 자신은 결코 역사의 낙오자가 아님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역사는 레닌의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1917년 7월, 임시 정부는 '동맹국에 대한 의무 이행'을 내걸고 러시아군의 출전을 명령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모험은 역시 실패로 끝났고 10여 일 만에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 국민들은 이제 더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거리를 가득 메운 50만 명의 군인과 노동자들이 외치는 구호는 이미 "임시 정부를 수호하자!"에서 "전쟁 반대!", "10인의 자본주의자 타도!"로 바뀌었으며, 마지막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황제가 러시아 국민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바로 그곳에서 임시 정부 역시 러시아 국민들에게 총을 들이댔다. 무장 세력에 진압당한 시위대의 피가 거리를 붉게 물들였고, 임시 정부가 레닌을 현상 수배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중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인 코르닐로프의 반란이 일어나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임시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소비에트와 볼셰비키는 성공적으로 임시 정부의 무장 세력을 진압했다.


무능한 임시 정부와 러시아 경제 붕괴

 가을이 되자 러시아의 경제는 거의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공업 생산량은 전년에 비해 3분의 2나 감소했으며 국가의 연간 채무 이자는 전쟁 전의 국가 예산과 맞먹었다. 식량 생산량 역시 감소해 시민들이 먹을 수 있는 빵은 하루 1.5파운드에서 1파운드, 0.7파운드, 0.5파운드로 점차 줄어들었고 마지막에는 그나마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혹시 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 사람들은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섰고, 부녀자들은 젖 달라고 보채는 아이를 안고 빵집 앞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가들과 상인들의 생활은 이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한 외국인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투자가들은 혼란한 틈을 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들은 그렇게 번 돈을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거나 임시 정부의 권력가들에게 뇌물을 주는 데 썼다. 산처럼 쌓인 식료품과 연료는 스웨덴으로 몰래 운송되기도 했다. 혁명이 시작되고 처음 4개월간 페트로그라드시 창고에 저장된 식량을 공공연하게 몽땅 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때문에 2년간 먹을 수 있는 곡식이 한 달도 채 넘기기 힘들 만큼 적은 양으로 줄었다."

 러시아인들은 점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전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식민지 쟁탈? 세력 범위 확장? 그게 우리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왜 우리가 굶주리고 다치면서까지 그 대가를 짊어져야 하는가?"


피어나는 혁명의 불씨

 어쩌면 러시아 국민들은 볼셰비키의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주장한 전쟁 중지와 토지 분배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에 따라 불과 2, 3개월 전만 해도 별다른 힘없이 조롱과 멸시를 받던 볼셰비키는 어느새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거대 정당으로 거듭났다.

 자산 계급의 임시 정부는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고 악화하는 상황을 통제할 수도 없었다. 러시아 사회에는 "곧 커다란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앞으로 굴러갔고, 임시 정부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폭풍우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쟁을 멈추게 하려면 임시 정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오는 방법밖엔 없었지만 레닌 외에는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역사적인 기회를 포착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모두 주저하고 있었다.

 1917년 9월 27일, 레닌은 무장 혁명을 주장했다.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놓았던 레닌은 "혁명은 예술과 같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그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대부분의 위원은 여전히 합법적인 투쟁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볼셰비키
191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2월 혁명 첫날 푸틸로프 노동자들을 파업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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