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국가 단위의 '경제 계획'을 시행하다.
소련의 1차 5개년 계획은 인류 최초의 경제 계획이었다.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정부가 '국가가 중공업 발전을 가속화하고 농업 부문의 투자를 줄이며 공업 투자를 늘린다.'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을 결정하면 농업, 공업, 군사, 문화를 비롯한 소련의 모든 조직이 법에 따라 결정된 사항과 관련된 자원 및 경영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면 국가계획위원회는 소련에서 가장 뛰어난 통계학자, 경제학자, 기술 전문가들을 동원해 대량의 자료를 분석하고 구체적인 5개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수정과 심사를 거쳐 최종 계획을 수립했다.
1차 5개년 계획의 내용은 모두 3권으로 무려 1,600페이지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중공업, 경공업, 농업, 금융, 합작기업, 문화, 교육, 보건, 사회생활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었으며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 5월,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의 제5차 대표 회의에서 1차 5개년 계획의 내용을 발표했다. 이는 1928년 10월을 기점으로 수립된 1차 5개년 계획을 사후 승인하는 자리였다. 이 계획을 발표하던 모스크바 대극장 의장석 위에는 커다란 소련 지도가 걸려 있었다. 보고자가 계획의 내용을 보고할 때마다 지도상의 해당 지점에는 작은 등이 켜졌다. 보고가 끝날 때쯤 소련 지도 위에는 1,000여 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에 가슴이 벅차오른 대표들은 모두 기립해 '인터내셔널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1928~32년까지 실시될 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 발전에 투입될 예산은 191억 루블이었으며, 그중 중공업 부문에만 전체 투자액의 4분의 3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4년 3개월 동안 공업에 실제 투자된 금액은 계획의 20.8퍼센트를 넘어서는 248억 루블이었다. 중공업 건설에 대한 투자는 1차 5개년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기간에 건설된 1,500개의 공장은 대부분 신기술과 장비로 만들어진 대규모 공장으로, 국민 경제 및 소련 공업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경제 관리 방식의 하나인 '계획'은 '시장'과 마찬가지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것은 정도는 다르지만, 오늘날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여전히 '계획'이라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스탈린은 소련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의 계획은 억측이나 으레 그러려니 하는 짐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지령적인 계획이다. 따라서 각 지도 기관은 이러한 계획을 반드시 집행해야만 한다"
1929년, 대공황
스탈린은 자본주의의 '계획'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자본주의에도 계획과 비슷한 것이 있긴 하다. 하지만 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억측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은 집행할 가치조차 없다."
당시는 생산, 운송, 판매의 과정을 국가가 모두 계획하고 분배했다. 국가는 계획을 실행하는 데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애썼다.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에서 생산되는 단추 가격이 1 루블이라면 280킬로미터 떨어진 모스크바에서나 4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단추의 가격은 똑같이 1 루블이었다. 심지어 벽돌 한 장, 신발 한 켤레, 속옷 한 벌도 모두 정부에 의해 계획적으로 분배됐다.
이에 따라 스스로 시장을 조절하는 요소들은 소련에서 점차 배제됐다. 지령성은 소련 경제의 모든 영역에 깊숙이 스며들었고 소련은 고도로 집중된 지령성 계획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를 두고 쿠비셰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계획 제도 속으로 벌써 이만큼 멀리, 그리고 깊게 들어와 버렸다. 경제, 문화, 과학 기술 등 이제 계획의 범주 안에 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경제 위기가 몰아닥쳤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 시장의 재채기 한 번으로 전 세계가 독감에 걸려버렸다. 뉴욕 주식의 급속한 하락으로 시작된 위기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를 뒤흔들어버린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자본주의 세계는 1,700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지만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된 경제 위기로 입은 손실은 자그마치 2,500억 달러에 달했다.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흔들어놓았고 이로 인해 서양 세계는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는 생산 속도가 급격히 하락했으며, 무역세가 감소했고 물가는 폭락했다. 기업과 은행은 연달아 파산했으며 실업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공업화를 나타내는 지표였던 트랙터는 사회주의 건설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트랙터 증가는 바로 농업 생산력 확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1929년, 전 세계 경제가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트랙터 생산 공장을 건립하기 위한 첫 삽을 떴다. 그리고 10개월 후 마침내 공장이 가동에 들어갔다. 트랙터 공장의 건설자 중에는 소련인만 아니라 미국인과 독일인도 있었다. 그리고 730명의 미국인 엔지니어가 이곳에서 일하기도 했다. 공장의 설비들은 모두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80여 개의 미국 업체들이 이 공장을 짓기 위한 설비를 생산했으며, 이렇게 생산된 설비는 테스트를 거친 후 소련으로 옮겨져 다시 조립됐다. 실제로 1930년대 소련의 핵심 기업 중 대부분은 외국의 선진 기술과 설비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스탈린은 훗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소련의 대기업 중 3분의 2가 미국의 기술을 이용해 지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32년에는 소련의 중공업 분야에서 일하는 각국의 전문가들과 기술자들이 2만 명에 달했다. 서방 세계의 부진과 달리 소련의 공업은 빠르게 발전했으며 소련 국민들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패기가 넘쳤다. 소련의 경제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고도로 집중화된 계획 경제 덕분이자 전 세계 경제 정세에 대한 소련의 판단 덕분이었다.
하지만 득이 있으면 실도 있는 법이다. 중공업 분야가 빠르게 발전한 만큼 소련 내의 곳곳에서는 다른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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