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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러시아

[러시아사]#55_대공황 이후 몰락한 자본주의 국가와 추월하는 소련

by 티제이닷컴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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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공황으로 붕괴한 자유주의 진영과 대비되는 소련의 상황

 1930년대 초반,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붕괴하였을 때, 사회주의 노선인 소련은 그 타격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덕분인지 소련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서방 국가가 수백 년에 걸쳐 완성했던 공업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 뒤에는 그늘진 대가가 있었다. 빠른 발전에 가려진 문제가 심각했다. 소련은 농업의 정상적인 발전을 무시한 채 중공업과 군수 산업의 성장만을 도모했기에 경제 발전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모든 경제생활을 통제한 국가가 시장 조절 작용을 무시한 탓에 나라는 강해졌지만 국민들의 생활은 여전히 곤궁했다. 이처럼 제때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은 소련의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세계는 소련의 성공에만 주목했을 뿐 이러한 잠재적 위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련만의 독자적인 '계획'의 방식은 서방 세계의 관심을 끌 만했다. 1930년대 서양 여러 인사들은 앞다투어 소련을 방문해 그 비결을 배워 가려했다. 당시 소련을 방문했던 한 미국인 기자는 귀국 후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실현 가능한 미래를 보고 왔다."

 '계획'은 금세 전 세계에 유행처럼 번졌다. 벨기에, 노르웨이, 영국은 어떻게 하면 '계획'을 배울 수 있는지 연구했으며, 독일은 1933년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끄는 신정권 역시 '계획'을 선택했다. 국가 관여의 방식을 통해 자유주의 시장 경제에 정부의 손을 개입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지식인들 대다수가 좌익으로 돌아섰다. 심지어 윌슨은 "공산당의 손에서 공산주의를 받아오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34년, 미국 작가 웰스는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는 14년 전 레닌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레닌이 세운 사회주의 건설 계획에 대해 코웃음을 치며 그를 "크렘린궁의 몽상가"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문에서 스탈린을 만난 이후 웰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현재의 자본가들은 반드시 당신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신을 이해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는 모두 전 세계 경제가 대공황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소련만이 발전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각국은 무역 전쟁을 벌이는 한편 국가의 힘을 통해 경제를 조절하려 했으며,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정권을 세움으로써 대외 확장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계획 경제의 문제점

 1차 5개년 계획은 지령적인 계획이었다. 중앙에서 정한 것이니 실제로는 국가 계획이었다. 이 계획의 주요한 내용은 모두 정치국에서 정한 것이었다. 최고 정치 기구에서 기술적인 결정을 내리고 임무를 모두 분배한 다음 다시 수정 작업에 들어간다.

 주어진 임무는 반드시 완성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은 파산을 면하기 어려웠다. 만일 계획을 완수할 수 없다면 다시 수정해야 했다.

 실제로 모든 상품에 대해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일부 목표는 보기에도 제멋대로인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 특정한 영역의 생산을 확대하는 데만 주력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보조적인 역할을 했던 영역은 발전할 수 없었다.

 지방 관리를 비롯한 일부 지도자들은 자신의 분야 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의 중공업 생산을 육성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모든 자금은 중앙에서 분배됐는데 생산하는 중공업 제품의 양이 많을수록 중앙에서 더 많은 양의 식품이나 의복, 가구 같은 소비 제품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이익이 많이 남는 반면 경공업은 그렇지 못했다. 경공업 제품은 아무리 많이 생산해 봤자 중앙에서 다 가져가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다음 다시 분배했다.


1차 5개년 계획의 과정

 1차 5개년 계획을 제정하는 데에는 5년 정도 걸렸다. 모든 분야를 다 포함한 관계로 시간도 오래 걸렸고 양도 무척 많았다. 이후 내용을 줄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최종 통과된 계획이 무려 책 세 권 분량이었다.

 1929년부터 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됐는데, 그해 10월 발생한 경제 공황으로 인해 러시아는 대출받을 수도, 새로운 공장을 지을 수도 없게 됐다. 당시 모든 물건은 석유를 이용한 교환이 아닌 화폐를 이용한 교환으로 구입해야만 했다.

 러시아는 1차 5개년 계획의 20퍼센트에서 25퍼센트 정도만 실천할 수 있었다. 계획했던 양이 워낙 많았던 탓도 있지만 경제 위기의 영향도 컸다. 하지만 러시아는 5개년 계획을 바탕으로 중공업 기반을 닦을 수는 있었다. 만일 1차 5개년 계획을 바탕으로 쿠즈네츠크에 철강 공업을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그리고 2차 5개년 계획에 따라 레닌그라드, 하리코프, 첼랴빈스크에 트랙터 공장을 세우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는 결코 질 높은 강철로 탱크와 로켓을 직접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게 소련 역사에서는 비극인데,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만든 공장이 결국은 살인 무기 제조장으로 변모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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