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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아메리카 정복기: 아즈텍 문명의 비극 첫 번째 이야기

by 티제이닷컴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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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땅 아메리카

 1501년, 이탈리아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2,400마일을 항해했다. 그는 이곳이 섬이 아니라 거대한 대륙임을 밝혀냈다. 독일의 지리학자 발드제뮐러는 1507년 이 대륙에 아메리고의 이름을 붙여 책자를 발행했다. 이때부터 신대륙은 '아메리카'라 불리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진출해 있는 동방의 나라들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해 스페인이 발견한 신대륙은 1520년까지만 해도 경제적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탐험은 계속되었다. 1520년대 이후 스페인의 유명한 식민지 개척자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등장했다. 아메리카의 광활한 대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의 새로운 영토가 되었다.

 신대륙을 처음 발견한 후 유럽으로 돌아갔던 콜럼버스의 함대는 다시 카리브해로 돌아와 에스파뇰라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이 있는 섬이다. 교황의 지시에 따라 모든 토착민은 반드시 가톨릭을 신봉해야 했다. 스페인 탐험대는 계속해서 파나마에 식민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카를 5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식민 개척자들은 이곳에서 채취한 황금중 5분의 1만 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개인이 가질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황금의 유혹 때문에 수많은 스페인 사람이 신대륙으로 몰려왔다.

 당시 스페인 왕실은 총독 관리하에 식민 개척자들이 현지 원주민을 모아 노동을 시킬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것이 바로 엔코미엔다이다. 엔코미엔다는 현지 원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봉건제도 안으로 흡수해 스페인의 신민으로 만들었다. 식민 개척자가 말하는 원주민 보호란 그들에게 노동과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대신 어느 정도 복지를 책임져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실제로 식민 개척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불과했다.

 

엔코미엔다
원래는 중세 스페인의 레콘키스타(국토회복운동)에서 큰 공을 세운 기사에게 주는 토지 분양 제도였다. 1503년 아메리카 발견 직후 급속한 원주민 노예화와 인구 격감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종신, 세습 성격의 봉건 영지화와 토지 매매의 금지로 인해 이 엔코미엔다는 중남미 독립 뒤에도 많은 영향을 남기는 특이한 제도가 되었다.

아즈텍 문명의 비극

 스페인은 에스파뇰라섬을 근거지로 삼고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1511년 쿠바를 정복하고 쿠바의 산티아고(지금의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시를 건설했다. 이곳에서 광산을 열고 농장을 경영하면서 많은 부를 쌓았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코르테스이다. 코르테스는 산티아고에서 기반을 닦아 후에 두 차례나 시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시장이라는 위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더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 불타고 있었다.

 1519년, 탐험대 두 팀이 쿠바로 돌아와 총독 벨라스케스에게 탐험 결과를 보고했다. 유카탄반도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생활, 관습, 군사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탐험대원들은 총독에게 그곳에서 발견한 황금을 보여주며 그곳에 엄청나게 많은 황금이 있다며 과장해 말했다. 탐험대가 가져온 황금은 코르테스의 욕망을 더욱 자극했다. 바로 이때 총독이 코르테스에게 원정대를 이끌고 아스텍(지금의 멕시코)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총독이 코르테스에게 내준 배는 겨우 한 척뿐이었다. 코르테스는 개인 재산을 털어 전함 3척을 더 구입했다. 그리고 그는 적극적으로 탐험대원을 모집하고 나섰다. 1519년 2월 10일 코르테스 함대가 출발할 당시 규모는 함선 11척에 병사 500여 명, 말 16필, 대포 17대에 달했다. 이 안에는 훗날 코르테스 정복을 역사로 남긴 연대기 작가 베르날 디아스도 있었다.

 탐험에 나선 코르테스 군대는 엄청난 인구를 가진 부족을 만났다. 아스텍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일찍이 멕시코 일대의 수많은 소부족을 정복해 유카탄반도에서 멕시코에 이르는 광활한 왕국을 만들었다. 아스텍은 정비된 대규모 군대도 가지고 있었다.

 3월 13일 코르테스 부대는 타바스코 강 하구에 상륙하자마자 수천 명의 타바스코 정예 부대를 만났다. 타바스코 군인들은 나뭇가지로 엮은 창, 화살, 투석기, 석검으로 코르테스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대포와 기병으로 간단하게 이들을 제압했고, 저녁 무렵 들판에는 타바스코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은 겨우 2명의 사망자만 나왔다.

 얼마 뒤, 코르테스는 아스텍 군사가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제물로 바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코르테스는 타바스코인들을 죽일 것이 아니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코르테스는 타바스코인들을 대포로 위협해서 협약을 맺었다. 코르테스는 타바스코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그들에게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스페인의 신민이 되도록 했다.

 다음날 코르테스 부대를 따라온 신부가 타바스코인들에게 교리를 강의하고 도시 중심부에서 미사를 진행했다. 타바스코인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각종 음식, 금장식품 그리고 여자 20명을 바쳤다. 가톨릭 세례를 받은 이 여자들은 스페인 간부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중 말린친이라는 여자는 다양한 원주민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코르테스의 정부가 되었다. 그녀의 탁월한 언어 능력은 코르테스의 대업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말린친은 언어만 아니라 현지 사회 동향에도 밝았기 때문에 코르테스의 최측근 고문이 되었다.

아즈텍 문명 유적지
현 멕시코에 위치했던 아즈텍 문명의 어느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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