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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 카를 5세와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by 티제이닷컴 2024.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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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 술레이만의 등장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다음 해 이스탄불에서는 술레이만이 술탄으로 등극했다.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던 그는 크림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의 총독으로 정치 경험을 쌓았다. 14세기에 세워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주요 정책은 기독교 국가와의 종교전쟁이었고, 술레이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1521년 8월 술레이만은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가 방어하고 있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이것은 곧 유럽 가톨릭 중심지로 가는 길목을 뚫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듬해 술레이만은 로도스섬을 점령했다. 이로써 이집트로 통하는 안전한 해상 항로를확보했고, 지중해 장악에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1526년 8월 말 헝가리 남부의 황량한 늪지대로 헝가리 기병 수만 명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이들은 여기에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 군대와 첫 번째 전투를 치렀다. 이곳 도나우강 유역 모하치 평원에서 술레이만은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늪지대를 건너갔으나 패하고 만다.

 하지만 후퇴한 다음 날 곧바로 다시 전투를 치러 헝가리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대포 300대, 총 1,000자루 앞에서 헝가리 군대는 마치 거침없이 쏟아지는 우박에 맥없이 쓰러지는 들풀과 같았다. 게다가 헝가리 국왕 루트비히는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빠져 죽었다. 전투는 불과 2시간 만에 끝났다. 며칠 후 술레이만은 헝가리 수도 부다 성에 오스만 튀르크 깃발을 올렸다. 곧이어 술레이만은 도나우강 건너편 페스트 성을 점령했다. 이후 오스만 튀르크는 이곳에서 100년 넘도록 가톨릭 유럽 세계를 위협했다. 이것은 모든 가톨릭 국가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1526년 헝가리 국왕 루트비히가 오스만 튀르크와의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할 당시 그에겐 왕위를 물려줄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에게 헝가리와 보헤미아 두 나라의 왕관을 이어받을 권리를 줬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이미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준 후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에 술레이만은 얼마 전 헝가리 국왕을 격파했던 모하치 평원에서 다시 페르디난트 1세를 공격해 승리했다.

 1529년 9월 술레이만은 대군을 이끌고 다시 부다를 점령했다. 9월 29일 술레이만은 가톨릭 세계의 중심 중 하나인 빈 성 아래까지 진출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술레이만의 10만 대군은 빈 성을 17일간 둘러싸고 공격했다. 그러나 강력한 대포를 갖추지 못한 탓에 빈 성 아래에는 술레이만 군사들의 시체가 쌓여갔다. 여기에 평년보다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바람에 술레이만은 10월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서방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지중해와 오스만 튀르크

 사실 술레이만은 지중해에서는 육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카를 5세는 제노바 출신 안드레아 도리아를 해군 제독으로 임명했다. 1533년 도리아는 그리스 남부의 코린트, 레판토를 점령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술레이만은 서구에서는 '붉은 수염 바르바로사'로 알려진 해적을 해군 총독으로 임명했다. 술레이만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모든 항구, 무기 공장, 군 조선소 등을 그가 관리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오스만 튀르크는 강력한 함대를 조직했다.

 얼마 뒤 바르바로사는 레판토 항구를 수복하고 튀니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연해 지역을 약탈하고 베니스의 작은 섬과 에게해의 요새를 공격했다. 바르바로사의 연이은 승리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동지중해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술레이만은 카를 5세와 원수지간인 프랑스 국왕과 비밀 협정을 맺어, 1543년 바르바로사가 프랑스 니스에서 연합군에 참가했다. 그는 니스를 약탈하고 돌아가는 길에 바르셀로나, 토스카나,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대포로 공격했다.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패배로 마감했다.


카를 5세의 최후

 1556년 한 무리의 스페인 군사가 횃불을 들고 황제 카를 5세를 부축하며 스페인 에스트라 마투라의 험준한 산길을 힘겹게 지나갔다. 검은 옷을 두른 카를 5세는 관절염의 고통을 참으며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어두컴컴한 산길을 통과했다. 이때 카를 5세는 이미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다. 유럽과 동방의 수많은 적수가 그가 세계의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도 루터도 바르바로사도 세상을 떠난 후였다.

 카를 5세는 은거 생활을 선택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속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는 이미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쉬 콩트, 밀라노, 나폴리, 아메리카 신대륙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산인 독일제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었다. 카를 5세에게 남은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직함뿐이었다. 유스테 수도원 원장은 수도원 입구에 서서 카를 5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호위병들이 카를 5세를 부축해 교회 단상 위에 서게 하자, 수도원에는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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