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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1_카이사르-브리튼 전기

by 티제이닷컴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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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브리튼 전기

 고대 로마 공화국의 통치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는 '갈리아 전기'에서 브리튼 원주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브리튼족은 모두 대청이라는 풀을 이용해 온몸을 물들이고, 얼굴색은 특히 파랗게 보이도록 했다. 그래서 전투 중에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또 그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머리와 콧수염을 제외한 온몸의 털을 밀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십여 명의 남자들이 한 아내를 공유하거나 형제간 또는 부자지간에 공유하는 일도 흔하다. 만약 이들이 아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그녀가 처녀였을 때 가장 처음 접한 남자의 아이로 간주한다."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인의 눈에는 브리튼족이 야만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원정하던 중에 이 브리튼족이 로마 군대의 적인 갈리아족을 지원한 것을 알고 분노했다. 그는 로마 문명의 위대한 사업을 위해 이들 야만인을 복속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브리튼 정복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기원전 55년 8월 26일 새벽, 카이사르는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1만 명의 로마 병사를 80척의 전함에 나누어 태운 뒤 영국해협을 건넜다. 잘 조직된 로마 군단은 해안에 상륙할 때부터 브리튼족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일단 브리튼에 안착하고 나서는 신속하게 그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브리튼족이 강화를 요청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곧 로마의 지원함대가 폭풍을 만나 늦어지는 틈을 타서 기습을 시도했다. 로마군은 브리튼족의 끈질긴 저항에 강화를 명분으로 제1차 원정을 수습하고 철수했다.

 카이사르는 기록에서 브리튼족이 용감하게 선전을 펼치기보다는 교란과 기습작전으로 로마군을 괴롭혔다고 기술했다. "전투에서 격퇴된 적들은 한참을 도망친 뒤 안정을 찾게 되자 곧 사신을 보내왔다. 이들은 인질 교환에 응하기로 하고도, 이를 이행하기는커녕 문제를 일으켰다."

 이듬해, 카이사르는 수송선과 전함으로 구성된 800척의 거대 함대를 이끌고 또다시 브리튼을 침공했다. 그는 제2차 원정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정오 무렵, 함대가 브리튼에 도착했다. 하지만 적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수백 척 군함에 기가 죽어 모두 해안 반대편으로 숨어버린 듯했다."

 카이사르의 대선단이 닻을 내려 돌격하려는 순간, 제1차 원정 때처럼 또다시 폭풍우가 몰아쳤다. 해협의 성난 파도는 로마의 함선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카이사르는 일단 공격을 멈추고, 부서진 전함들을 수선하기 위해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카이사르는 마침내 브리튼 정복에 성공했다. 그는 브리튼족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명한 뒤 대륙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로마와 두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영국해협이 브리튼의 천연 요새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해저가 얕고 가파른 데다 폭풍이 심해 이후 영국인이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도 일등 공신으로 활약한다.

 카이사르가 브리튼을 정복했을 때, 영국은 비록 패했으나 섬 바깥의 문명 세계와 처음으로 접촉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했다. 특히 그들은 당시 세계 최강의 로마 군단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하며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십 수세기가 흐른 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지난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일찍이 두 번이나 쫓겨
해안가 저편으로 달아났던 자들.
그들의 함선은 가련한 물거품이 되었네.
솟아오르는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고 마는 조개껍데기처럼...


 결국 로마 제국은 갈리아를 통치하듯 브리튼을 다스릴 수는 없었으며, 브리튼인은 사실상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카이사르와 함께 브리튼에서 철수한 로마 군대는 이후 100여 년 동안 브리튼 땅을 밟지 못했다. 그 사이에 브리튼족은 로마 문명과 고유 문명을 융화, 발전시키며 번영을 누렸다.

런던
오늘날 영국의 수도 런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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