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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34_크롬웰의 생애와 크롬웰 관점으로 본 영국내전

by 티제이닷컴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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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의 생애

 1599년,  크롬웰은 잉글랜드 헌팅던의 평범한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며 청교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대학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 20여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조세와 법률을 공부하며 지냈다. 이때까지 크롬웰은 전혀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열 명이 넘는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1628년과 1640년에 각각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영국 내전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지 않았더라면, 크롬웰은 아마도 가난한 시골 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40세가 넘도록 단 한 번도 군인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그때까지는 누구도 그에게서 군사 영웅의 기질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42년 8월, 영국 내전이 발발하자 크롬웰은 스스로 떨쳐 일어나 청교도 농민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60여 명으로 구성된 기병 부대를 조직하여 그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갔다.

 놀랍게도, 이 가난한 촌부는 지휘관으로서의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며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무적의 부대를 양성했다. 1644년 그는 부지휘관에 올랐고, 그해 7월에는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왕당파를 격파해 승리를 거두었다.

 기록에 따르면, 크롬웰의 부대는 전투를 벌일 때 성서의 시편을 노래했고, 싸움할 때도 전도 활동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청교도 사병들은 음주할 경우 체벌을 받았으며, 적진을 향해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크롬웰의 영국 내전

 크롬웰은 기병을 이용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측면 우회 전술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그의 군대는 점점 규모가 커지는 한편, 엄격한 규율로 인해 갈수록 강력한 정규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울러 크롬웰의 용맹함과 뛰어난 상황 통제 능력, 그리고 세심한 훈련과 엄격한 군율, 신속한 식량 보급선 확보 등에 힘입어 그의 군대는 무적 신화를 만들어갔다. 크롬웰의 철기 군은 군대로서 특별한 전술을 보여줬다기보단 기본적인 것들을 다 지켰기에 우수한 군대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1644년 12월, 크롬웰은 내란을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던 의회에 의안을 제출했다. 그는 용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실시할 것과 통일된 체계 아래 정규군을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1645년, 영국 역사상 최초의 정규군인 '신형군'이 탄생했으며, 크롬웰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진 네이즈비 전투에서 크롬웰은 신형군의 지휘를 맡아 왕당파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로써 제1차 내전은 의회군의 전승으로 일단락되었다. 1646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잉글랜드 의회로 신병이 넘겨졌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크롬웰은 그 정도 성과에 만족할 뿐, 국왕의 목까지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잉글랜드가 입헌군주국으로 가기를 바랐기에 명목상의 군주는 있되 의회가 실권을 장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찰스 1세가 의회의 포로가 되었지만, 의회군의 총수였던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접견할 때도 신민이 국왕을 알현하는 것처럼 예를 갖추었다. 찰스 1세는 왕좌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엄 있게 크롬웰을 백작으로 봉하기도 했다.

 의회군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불행하게도 의회는 종교 파벌 간의 갈등과 군대와의 대립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다. 감금 중이던 찰스 1세는 이틈을 타 탈출을 기도했다가 와이트섬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스코틀랜드 밀정과 내통하며 의회와 군대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하는 협상을 벌였다. 찰스의 왕비는 유럽 대륙에서 병력을 모집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648년, 의회와 국왕 간의 제2차 내전이 발발했다.

 우수한 병력을 보유한 크롬웰은 이미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왕의 군대는 미처 반격할 겨를도 없이 크롬웰 군대에 의해 하나하나 궤멸하여 갔다. 그해 8월, 마지막 남은 왕당파였던 스코틀랜드 군대가 프레스턴에서 전멸하면서 제2차 내전도 막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찰스 1세를 찾아온 것은 크롬웰의 자비가 아닌 죽음의 사신이었다. 크롬웰은 이미 작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바로 국왕의 머리였다.


유튜브 토크멘터리전쟁사 영국내전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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