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영국

[영국]#33_크롬웰의 영국과 크롬웰 사후의 영국

by 티제이닷컴 2024. 7. 25.
728x90
반응형

청교도 금욕주의를 강요하다

 한 영국 역사 연구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후, 크롬웰이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는 자신을 '호국경'이라고 칭했다. 국민들의 생활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고, 너무도 많은 것들이 변해 버렸다. 크롬웰은 국민들이 모두 청교도 방식으로 생활하기를 원했다.

 크롬웰은 모든 술집과 극장을 폐쇄하고 체육활동을 금지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크리스마스 축제를 금지하는 최악의 조처를 하면서 병사들에게 일반 가정집을 수색해 크리스마스 선물과 음식 등을 모두 압수하게 했다.

 청교도가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만큼 청교도 방식의 생활은 잉글랜드를 매우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크롬웰이 통치하는 5년 동안, 잉글랜드에는 체계적인 정치체제가 마련되었고 행정기구 및 절차도 완비되었다. 그는 법률체계를 엄격하게 정비하고, 문화교육 사업을 장려하는 것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종교의 자유에 관대하여 유대인의 잉글랜드 내 거주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종교활동까지도 인정해 주었다.

 특히 크롬웰의 외교정책은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크롬웰의 최대 공적은 바로 해양 진출에서 찾을 수 있다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다시 해양 강대국으로, 네덜란드를 격파하다

 국내의 혼란이 진정되자 크롬웰은 바다로 눈을 돌렸다. 그는 보호무역법인 '항해조례'를 선포하여 네덜란드와의 해상전쟁을 도발했다. 이것이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1654)이다. 이 전쟁을 통해 영국은 해양 강국으로 복귀했고, 이때부터 해상 패권국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일진일퇴를 거듭한 이 전쟁이 영국의 우세로 마무리됨에 따라 영국은 상당한 실리도 취하게 되었다. 영국 해군이 전쟁 중에 네덜란드 상선을 1,700여 척이나 탈취함으로써 영국은 원양 함대를 확충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 함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전 세계를 누비게 되었다. 이렇게 영국이 전 세계 해양 무역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바다의 마부'라고 불리던 네덜란드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크롬웰의 시대가 열린 이후, 영국 해군은 조직력을 키우고 우수한 무기를 갖추는 등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기반을 충실히 다져나갔다. 그 결과, 1651년에서 1660년까지 영국 해군은 200척의 군함을 증강했고, 해상순찰 범위도 지중해에서 발트해까지 확장했다.

영국-네덜란드전쟁
영국-네덜란드전쟁


크롬웰의 죽음 이후의 영국

 이처럼 위세를 떨치던 독재자 크롬웰의 권세도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그는 1658년 말라리아에 걸려 런던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크롬웰에 대해 평가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역사학자들은 크롬웰이 통상적으로는 독재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통치로 인해 영국은 새로운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잉글랜드에는 군주제가 부활했지만,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전제군주제를 받아들일 잉글랜드가 아니었다.

 크롬웰이 숨을 거두자 공화국은 곧바로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임종 전에 자기 아들 리처드를 호국경 2세로 임명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재목은 못됐다. 거칠고 난폭한 군대는 리처드의 명령을 무시했고, 그나마도 곧 그를 퇴위시켜 버렸다. 국가권력은 좌충우돌로 날뛰는 고위 장교들의 손에 넘어갔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공화국은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크롬웰의 장례식을 지켜본 한 목격자는 통치자의 마지막 길을 이렇게 묘사했다. "호국경의 성대한 장례식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광기 어린 장례 대열이었다. 개가 짖어대는 것 말고는 누구도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야만적인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녔고, 이곳저곳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다."

 군대와 의회는 사태가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자 프랑스로 망명한 찰스 1세의 아들을 생각해 냈다. 이 불운한 왕위계승자에게 잃어버린 왕국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브레다 선언'을 통해 청교도혁명 중의 행위에 대해 대사를 베풀고, '국왕 시해죄' 이외에는 어떤 죄도 추궁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또한 이 성명에서 그는 "혁명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사면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혁명기의 토지변동 사항도 모두 인정한다. 또 의회의 전통적인 권력도 복권하겠다."라고 천명했다. 이렇게 영국은 점차 질서와 안정을 되찾아갔다.

  의회는 찰스 스튜어트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강력한 국왕'이라는 의안을 통과시켰다.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은 일치된 국민의 뜻에 따라 왕위에 등극했다. 그가 바로 찰스 2세이다. 이로써 스튜어트 왕가는 다시 왕정을 복구하게 되었다.

 호국경 2세 리처드는 프랑스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크롬웰의 무덤은 왕당파에 의해 무참히 유린당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