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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54_아이작 뉴턴과 과학혁명 두번째 이야기

by 티제이닷컴 2024.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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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그 이후의 삶

 과거 인류의 사상은 미신과 공포감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물은 왜 아래로 떨어질까? 태양은 왜 떠오르고 지는 걸까? 등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간단한 문제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의 신비한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뉴턴이 등장하면서부터 인류는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위대한 저작을 통해 과학 시대의 도래를 널리 알렸다. 신의 발아래 꿇어 있던 인류는 비로소 제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서양인은 인류에 끼친 영향력에 비추어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 다음으로 뉴턴을 꼽기도 한다.

 뉴턴이 본 세상은 정확한 법칙과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만유인력이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인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행성은 예외 없이 타원운동을 하고, 덕분에 사람들은 언제쯤 행성의 위치와 속도가 변하는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유럽 지식사회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지만,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뉴턴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많은 사람이 뉴턴과 같은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물질세계에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류사회에도 이와 같은 법칙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뉴턴이 자연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것처럼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면 인류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즉, 사회발전의 법칙을 이해하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시대의 세계관을 일컬어 '이성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뉴턴은 이 시대의 막을 연 개척자로 평가된다. 알렉산더 포프는 자신의 유명한 시를 통해서 뉴턴에 대한 감상을 표현했다.

자연과 자연법칙은 암흑에 뒤덮여 있었건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뉴턴을 내려보내노라!
그로 인해 만물이 빛을 찾게 되리라.

 뉴턴은 인류의 이성주의 시대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과학적 실천을 통해 인류 역사 5000년 동안이나 간극을 메울 수 없었던 '기술'과 '과학'의 격차를 뛰어넘게 해 주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산업혁명'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뉴턴의 과학적 사고로 인해 근대 과학이 탄생한 이후, 인류는 실험실에서 사물의 본질과 원리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법칙과 원리를 응용해 기술을 발명했고, 그 기술을 통해 제품의 생산성을 제고시켰다. 이렇게 과학-기술-생산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고, 인류는 18세기 이후 300년 동안 위대한 발명품들을 쏟아냈다. 이는 지난 5000년 동안의 발명 횟수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 뉴턴의 영감과 천재성을 모두 소진한 듯하다. 뉴턴은 이후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뉴턴은 유명한 철학자 존 로크에게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며 비난이 섞인 항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고는 또다시 사과의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명예혁명이 일어난 후, 뉴턴은 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좀처럼 대중 앞에 나서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1696년에 조폐국 국장으로 임명되어 우수한 화폐들을 많이 찍어냈다. 이때부터 뉴턴은 스스로 다시는 과학 연구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말년의 뉴턴은 연금술과 신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더 이상 과학 연구에 뜻을 두지는 않았지만, 1703년 영국왕립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727년, 뉴턴이 사망하자 영국은 국장으로 엄숙히 장례를 치른 뒤 그를 왕족들만 묻힐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했다. 뉴턴은 살아서는 기사 작위를 받은 최초의 과학자였고, 죽어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묻힌 최초의 과학자가 되었다.

 뉴턴을 영원히 떠나보내던 날,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었다. 공작 2명과 백작 3명, 그리고 대법관이 뉴턴의 관을 운구했다. 성당 안에 장송곡이 울려 퍼질 때 왕족과 귀족, 정부 대신과 문인 학자들이 차례로 나와 이 위대한 과학자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뉴턴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깊은 감동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사람들이 참배한 것은 국왕들의 묘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나라를 빛낸 거장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국가가 바친 기념비였다. 이는 영국인들이 과학자와 과학을 얼마만큼 존중하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영국 전체가 한 과학자의 죽음에 애도와 경의를 표했다. 이는 영국이 과학자에 대해, 그리고 과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뉴턴이 안치된 웨스트민스터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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