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과 로버트 훅의 논쟁
아이작 뉴턴은 그다지 대인관계가 좋지는 못했다. 그는 당대에 유명한 과학자 로버트 훅과 어떤 이론을 누가 먼저 생각해 냈는지를 두고 자주 논쟁을 벌였다. 일화에 따르면, 뉴턴은 훅을 지독히 싫어해서 그의 초상화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오늘날 뉴턴의 초상화가 4~5장 정도 남아 있는 것에 비해, 훅의 초상화는 단 한 장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뉴턴 체계의 본질
뉴턴은 전통적인 연금술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는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들여 연구했다.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우주 공간에 작용하는 중요한 개념에 대해 제시하였다. 그 힘은 분명 존재하지만 증명할 수도, 또 증명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연금술에 대한 연구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뉴턴 체계의 본질은 지구와 다른 천체가 모두 동일한 법칙하에 움직이며, 이를 양적으로 계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태양계의 어느 일부분을 떼어낸 후 이 법칙에 근거해 계산해 본다면, 그 행성이 어느 곳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잉글랜드 은행
영국은 일련의 전쟁을 통해 대약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17세기말,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영국 정부는 엄청난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1694년, 재정위원이었던 찰스 몬터규(핼리팩스 경)는 전쟁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출기구 설립을 건의했다. 즉, 정부에 자본금 120만 파운드를 대출해 주는 대가로 그와 동액의 화폐 발행권을 갖는 유한책임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의회는 이 같은 건의에 기반하여 잉글랜드 은행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런던의 부유한 상인들이 앞다투어 주식을 매입했다. 이렇게 잉글랜드 은행이 창설되었다.
"국가는 배이고, 지주는 선주이며, 상인은 승객일 뿐이다." 당시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나마 한 가지 긍정적인 측면은 상인들도 이제 국가라는 배에 올라타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정도였다. 잉글랜드 은행은 특히 이 상인들에게 현대적 금융의 매력을 각인시켜 주었다.
1844년, 의회는 '은행 특허 조례'를 통해 잉글랜드 은행을 발권부와 은행부로 나누도록 규정했다. 발권부는 1,400만 파운드의 증권 및 금보유고 총액과 같은 금액의 은행권을 발행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 밖의 발권은행에 대해서 발행 정액을 규정하는 권한도 갖게 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 은행은 점차 전국의 화폐 발행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1928년에 이르러서는 영국 유일의 발권은행으로 자리 잡았다. 이로써 잉글랜드 은행은 '은행의 은행'이라는 지위를 확립하면서 근대 중앙은행의 이론적, 업무적 본보기가 되었다. 1946년 이후, 잉글랜드 은행은 국유화되어 본격적으로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 주요 임무는 정부의 요구에 따라 국가의 금융정책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영국인은 네덜란드인이 창안해 낸 은행을 개선하여 금융재정이 사업 활동의 추진력이 되도록 완성했다. 따라서 은행가들은 '누가 진정한 생산자인가?'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 파운드를 벌어다 줄 사람에게 자금을 빌려줄 필요가 있었다.
중상주의 이념이 지배하던 영국에서 거래의 기반은 상품이고, 적은 비용을 들여 많이 파는 것이 바로 돈을 버는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국내 생산력을 키워 상품을 더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팔아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영국인들은 식민지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원료 공급처 및 상품시장으로 여겼다. 이로써 식민지는 영국 산업 체제의 주요 구성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생산에 집중했던 영국인의 가치관은 산업혁명을 이끈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영국의 경제학자 아서 루이스는 이 시기의 영국을 이렇게 묘사했다.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온통 돈 버는 일과 상업에 빠진 민족이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작은 가게 주인'의 나라라고 조롱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작은 가게 주인은 제조업과 항해 기술을 이용해 전 세계를 호령했다. 자본, 생산, 판매, 그리고 시장을 주무를 수 있는 상품경제의 거대한 손이 '자유'와 '민주' 사상과 만나자, 영국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잉글랜드 은행은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 제도의 근간을 마련했기에 '중앙은행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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