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상을 펼쳤다. "경쟁은 독점이 아니라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동력이다. 모든 상업에서 이득을 얻는 법칙은 가능한 한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구매는 모든 국가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물건을 거래할 때 가능하며, 동시에 가장 이상적인 판매는 시장에 소비자가 아주 많을 때 가능하다."
그는 한 국가의 경제가 가장 자유롭고 여유로울 때 발전을 이룰 수 있으며, 국가의 지나친 간섭은 경제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무런 제약 없이 순전히 경제법칙을 따르기만 하면, 어느 국가든 부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미스는 경쟁이 어떻게 사회를 발전시키는가에 대해서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의 이론을 들어 설명했다. "모든 사람은 끝없는 자기만족의 욕망을 갖고 있다. 만약 아무런 제약 없이 제멋대로 욕망을 표출하게 된다면 사회는 온통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인류는 '경쟁'이라는 자기 보호 기제를 만들어냈다. 즉,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결국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경쟁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효과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스미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고 있다. "도살업자나 양조업자, 제빵사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은 그들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이윤을 얻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당시 이 이론은 영국 사회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뉴턴의 역학이 산업혁명의 문을 열었다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산업혁명의 발전을 위한 경제 질서를 확립한 셈이다. '국부론'에 서술된 노동가치, 분업 및 유효수요 이론 등이 역사에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산업혁명의 본질은 석탄, 철강, 방직 산업 등에 나타난 눈에 띄는 변화나 증기기관의 발명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부의 생산과 분배를 독점하던 중세적 규범을 경쟁으로 대체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후 보이지 않는 손의 이론은 와트와 볼턴으로 대표되는 신흥 자본가계급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다. 그들이야말로 스미스가 말하던 '최대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신흥계급은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국가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아주 오랫동안 전 세계의 상업활동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스미스가 구상한 게임의 법칙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는 1929년, 대공황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등장한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의 혁신적인 이론으로 대체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다.
'국부론'이 출간되고 12년 후, 애덤 스미스는 한 공작의 만찬에 초청받았다. 그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기립하여 위대한 경제학자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스미스가 멋쩍어하며 앉으라고 하자, 만찬 참석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윌리엄 피트 총리가 말했다. "박사님, 먼저 앉으시지요. 학생이 선생님보다 먼저 앉는 법은 없으니까요."
나폴레옹과 영국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힘겹게 승리를 거둔 영국은 다시 한번 애덤 스미스에게 감사해야 했다. 웰링턴 공작이 나폴레옹 1세를 물리친 이 전쟁에 대해 일부에서는 "영국 군대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시장경제의 승리이기도 하다."라고 평가했다.
나폴레옹은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해 영국에 대해 프랑스와 전 유럽에 걸친 '대륙봉쇄령'을 단행했다. 자국의 독점적 무역을 보호하는 경제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반발한 영국은 즉각 프랑스와 그 동맹국에 대해 해상봉쇄령으로 맞섰다.
이 무역전쟁은 프랑스와 유럽 대륙에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영국은 막강한 경제력과 해외시장을 기반으로 유럽의 봉쇄정책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참패로 끝났고, 결국 프랑스와 유럽 동맹국들은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것은 바로 국가 간의 경제력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경제는 더 이상 군사와 정치의 시녀가 아니었다. 사실 프랑스의 실패는 예견되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영국군과 전투를 벌일 때 그들이 입고 있던 군복은 모두 영국제였다. 나폴레옹이 '작은 가게 주인'이라고 비웃었던 나라의 면직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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