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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58_19세기 산업화된 대영제국의 경제 호황

by 티제이닷컴 202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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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무역 정책과 영국의 호황

 영국은 산업 부문에서의 경쟁우위를 적극 이용해 자유무역 정책을 시행했다. 무역장벽을 제거하여 해외시장을 확대했다. 영국은 스스로 타국 제품의 수입 장벽을 철폐하고, 다른 나라에도 영국 제품에 대해 동일한 조처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통해 자유무역은 영국의 핵심적인 국가정책이 되었으며, 영국 제품은 전 세계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또한 1894년, 약 2세기 동안 시행되었던 '항해조례'도 폐지되었다.

 크롬웰 시대의 '항해조례'는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제정된 법률이었다. 여기에는 영국 및 기타 국가의 화물을 수입할 때는 반드시 영국 또는 수출국의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해양 강국이었던 영국은 '항해조례'를 폐지한 후 해운시장을 개방했다. 이는 자유무역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1852년, 의회는 영국 자유무역이 영국의 국책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렇게 영국은 시대에 맞지 않는 중상주의 대신에 자유무역주의를 선택했다. 역사의 발전에 따라 가장 적절한 대응책을 취한 것이다. 영국은 스스로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으며, 더 이상 적수가 없었기에 비로소 자유주의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반복해서 강조했던 점이다.

 영국은 충분한 경쟁력이 없을 때는 보호무역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결코 시장을 개방하지 않았지만, 자유무역을 실시할 만큼의 경쟁력이 갖추어지자 타국의 시장 개방을 요구하여 서서히 장악해 나가는 전략을 취했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 노선은 경쟁국이라도 분명히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 급격한 사회변혁을 거친 19세기 중엽의 영국에서는 더 이상 예전 같은 전원 풍경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온통 바쁘게 돌아가는 산업화의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농촌에는 회색빛 공장들이 들어섰고 도시에는 높은 굴뚝이 세워졌다. 공장 안은 요란한 기계음이 울렸고, 용광로에는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내렸다. 1850년에 이르러서 영국의 도시 인구는 총인구의 60퍼센트를 넘어섰다. 영국 내 철과 면직물 생산량은 세계 총생산량의 절반 이상, 석탄 생산량은 3분의 2에 달했다. 이런 결과는 영국이 세계 최초의 산업화 국가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영국인은 당시 유럽 대륙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영국을 여행했던 한 프랑스인은 경탄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영국에서는 시골 사람들도 벽돌로 지은 농가에서 산다. 모직 옷과 가죽신, 흰 빵은 그들의 여유로운 일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산업화는 영국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까지 바꾸어 놓았다. 이들은 시간을 '초' 단위까지 잘게 나누어 사용했고, 마차와 범선 대신에 기차와 증기선을 타기 시작했다. 1851년, 영국에는 이미 22개 노선의 철도가 부설되었고, 그 길이만 해도 1만 3,000킬로미터에 달했다.

 프로이센 국왕은 "국민생산과 부에 있어서 영국의 경제적 지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찍이 어떤 국가도 이루지 못했던 수준으로 빠르게 성장했다."라고 부러움을 토하기도 했다.

 이렇게 영국은 산업혁명을 완성한 동시에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이는 대영제국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빅토리아 시대에 자유방임주의가 절정에 잘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의 부작용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당시 사람들은 뼈아픈 교훈을 통해 자유방임주의의 모순을 깨닫게 되지만, 세계 최초의 경제 위기는 이미 1825년에 발생했다.


17~19세기 영국의 중상주의

 중상주의는 국가 간의 무역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국제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만약 한 국가가 이득을 보게 되면 다른 국가는 손해를 보는 구조라고 인식하게 된다. 무역은 부를 재분배하는 과정일 뿐, 새로운 부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상주의자들은 수출을 호재로, 수입을 악재로 간주한다. 그래서 이들이 취한 경제정책을 보면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 성격을 보인다. 이들은 높은 관세나 까다로운 무역 제한 조치를 주장했기에 '보호무역주의자'라고 불린다. 영국과 식민지 간 무역은 타국의 선박 및 식민지와의 거래를 금지하는 '항해조례'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규제는 오히려 한 나라의 발전 과정에서 경제의 전문화를 가로막을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 제한 조치는 영국에게 이로운 것이 없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공산품을 대량으로 수출한 뒤 식량 등을 수입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19세기가 되어서야 점차 보편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영국은 철저한 중상주의 국가였다. 이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자국의 무역을 보호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영국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러한 중상주의 정책을 신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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