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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11_폐번치현,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작

by 티제이닷컴 2023.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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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적봉환' : 다이묘들이 판(토지)과 적(농민)을 천왕에게 반납한 일.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의 신정부 주도 세력이 앞장서서 봉환함으로써 다른 다이묘들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판적봉환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전국 토지와 농민은 천황, 다시 말해 중앙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1869년 2월, 위의 네 번은 웅번들이 도막 파의 압력에 의해 천황에게 판적봉환을 실시해야 한다는 상주를 올렸다. 그해 7월, 이미 236개 번의 판적(땅과 농민)이 봉환되어 각 번의 번주들이 백성과 토지에 대한 봉건 영유권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번의 칭호는 유지했으며, 옛 번주가 번지사로 임명되어 각 번의 최고 행정 장관이 되어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라 번을 통치했다. 다이묘와 구게의 칭호는 폐지되었으며, 모두 화족으로 변경됐다.

 왕정복고는 일본 고대의 천황제로 복귀하는 것이고, 과거 역사를 다시 불러내는 것은 현실 투쟁에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판적봉환 이후, 중앙 정부는 또다시 새로운 관제 개혁을 실시해 태정관 위에 신지관을 두어 신권을 빌려 천황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폐번치현

 신정권 수립 이후, 농민 봉기와 사족(선비나 무인의 집안 또는 그 자손)의 반란은 끝날 기미 없이 일어났다. 기도 다카요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민을 사농공상의 4계급으로 구분 지어서 점차 사족들의 봉록을 취소하며, 끝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하도록 하여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우선으로 병권을 통일해 정권을 통일시켜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다음 수순은 폐번치현(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다)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신정권의 주도 세력이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군사력이 막강했으므로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상의해야만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전쟁이 끝난 후 가고시마로 돌아가 정치에는 완전히 손을 뗀 상태였는데, 특권을 잃은 사족들은 그의 깃발을 높이 들고 반발하며 소란을 피우기 일쑤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신들과 힘을 합치지 않으면 상비군을 창설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로 임명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함께 조슈번과 사쓰마번으로 가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났다.

 도사 번에서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 번의 병사 8,000명을 이끌고 도쿄에 와서 천황의 친위병이 되어 메이지 신정부 최초의 상비군이 돼주기를 요청했다. 폐번치현이라는 큰 목표 아래 사이고 다카모리는 신정부 일부 관리들과의 갈등을 풀고, 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끝냈다.

 1871년 8월 29일, 기도 다카요시는 천황의 명의로 56명의 번지사 앞에서 폐번치현을 선포하는 조서를 낭독했다. 261명의 번주와 지사 관직을 취소하고, 도쿄에 정착해 국가의 봉록을 받도록 했다. 옛 번주 재정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각 번주의 채무를 부담했으며, 후에는 정부 공채의 형식으로 옛 번의 부채를 전부 흡수했다. 이런 방식으로 번주의 할거 세력을 소탕해 일본은 중앙 집권적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폐번의 기초 위에 중앙 정부는 홋카이도에 개척사를 설치하고, 도쿄, 오사카, 교토 3부와 72개의 현을 설치해, 1도 3부 72현으로 국토를 정리했으며, 이 제도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도쿄 부를 도쿄도로 정리하였고, 지금은 '1도 1도 2부 43현'으로 편성되어 있다.

 폐번치현 이후, 신정부는 새로운 관제 개혁에 착수해 당시 일본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을 정원과 좌원, 우원으로 분리했다. 정원은 입법, 행정, 사법의 결책권을 가지고, 19살의 메이지 천황이 지방 관리들을 직접 통제하는 구도가 수립되어 모든 권력이 천황에게 집중되는 구조가 확립되었다. 관리로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태정대신 산죠 사네토미와 우대신 겸 외무경 이와쿠라 도모미가 구게 출신인 것을 제외하면,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 야마가타 아리토모,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노우에 가오루는 모두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 등 도막 운동의 중심이었던 번의 웅번 출신이었다.

태정대신 산죠 사네토미
천황의 앞에서 다이묘들에게 포고령을 발표하는 태정대신 '산죠 사네토미'


 이는 정권이 봉건 영주와 구게의 손에서 중하급 사무라이의 손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번벌 정치(같은 번 출신자가 정부 요직을 독점하여 정치를 그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함) 세력은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자 다이쇼 시대(1912~1926), 쇼와 시대(1926~1989)의 원로가 되어 일본 현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앙 정권이 안정화되자, 신정부는 부국강병 정책을 실시해 먼저 서양 열강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구미 사절단 각 단원들의 마음속에는 '이 목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하는 중대한 과제가 그들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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