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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12_구미 사절단의 서구 열강 방문

by 티제이닷컴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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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쿠라 사절단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1872년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폭설과 바람으로 발이 묶여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보름 동안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부사인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간에 조약 개정 요구안을 작성했다. 일본은 안세이 조약의 효력이 1872년 7월로 만료되면 구미 각국의 정치 제도와 풍습, 교육 등을 일본에 도입해 국력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을 열강과 같은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기를 희망했다.

구미 사절단
구미사절단(이와쿠라 사절단)

미국 방문

 1월 21일, 사절단이 워싱턴에 도착해 그랜드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성대한 연회에 참석했다. 사절단은 미국의 선진화된 항해 기술과 철도 기술, 그들과 다른 신기한 풍습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약 개정 단계에서 사절단은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해밀턴 피쉬 미국 국무장관에게 조약 개정을 제안하자, 피쉬 국무장관은 국제관례를 내세워 천황이 발급한 교섭 전권 위임장을 사절단에게 요구했다. 이런 국제관례에 익숙지 않던 일본 대표단은 어쩔 수 없이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으로 귀국시켜 전권 위임장을 받아오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사절단 파견 목적이 외국의 법률과 제도 연구임을 재차 강조하며 일찌감치 조약 개정 협상을 실시하는 데 반대했다.

 그런데 오쿠보 도시미치가 국서와 새로운 전권 위임장을 가지고 다시 워싱턴에 도착한 날, 조약 개정 협상은 중단되어 버렸다. 기도 다카요시는 그날 일기에 "저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으나, 우리는 그러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만 삼킬 뿐이다."라며 통탄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미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잡혀 있는 조약을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고로 사절단의 조약 개정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사절단은 국제 관계에 있어 약소국의 위치가 주는 외교력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이때 뼈저리게 느꼈다. 미국에서 6개월 가까이 체류한 사절단은 이제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의 외무장관은 관세자 주권 회복 등의 조약 개정 협상은커녕 오히려 현행 조약보다 더 가혹한 조약 개정안을 제시했다. 일본에 내륙 여행권과 연해 무역권, 토지 소유권을 내어 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더욱 가혹한 개정안을 들고 나와 한꺼번에 일본을 압박했다.

유럽

 사절단은 서구 열강의 강압적인 권력을 더욱 절실히 느꼈고, 이 치욕을 잊지 않고는 이후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대할 때 그대로 적용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절단 내부에서도 분열이 나타났다.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계획에 없던 조약 개정 협상을 실시하는 것에 불만을 품어 둘 사이에 언쟁이 끊이질 않았다. 기도 다카요시는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동조하는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조약 개정 협상이 결렬되자, 사절단은 서양 각국의 각종 제도를 연구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들은 같은 해 10개월에 걸쳐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총 12개국을 방문해 각 나라의 제도를 연구했다. 그들은 정부 기관과 의회, 법원, 기업, 거래소, 각종 공장, 광산, 항구, 농장 및 목장, 군대, 요새 등을 둘러보았고, 서구 문명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성과는 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서양 세계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이와쿠라 도모미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각국의 상황을 시찰해 보니, 강대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서구의 2, 3류 국가들마저도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적으로 발달해 있었다."라며 한탄했다.

영국

 영국의 버밍엄과 맨체스터 도처에는 공장이 세워져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생산한 제품을 바닷길을 따라 전 세계로 수출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섬나라라는 공통된 특징을 일본과 공유하고 있었지만, 생산하는 제품은 너무도 달랐고, 그 결과 역시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자원이라고는 석탄과 철밖에 없는 영국에서 공업과 무역을 결합해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던 것이었다.

 이곳에서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 세계에서 독립 국가로 살아남고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면 반드시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겼다. 영국 방문은 오쿠보 도시미치로 하여금 귀국 후 '식산흥업(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킴)'을 건의하였고, 일본이 영국을 본보기로 삼아 상공업 발전에 주력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센

 프로이센을 방문했을 때, 프로이센의 국정이 일본과 매우 비슷한 상태임을 발견했다. 프로이센을 본보기로 일본에 집권 주의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기로 이때 결심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도 민주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일본의 군주 전제 체제가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를 당장 시행할 수도 없으므로 일본의 특성에 맞는 헌법 체계를 제정해 일본의 천황제에 근대화된 이미지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궁정 파 정치가로서 줄곧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 체제를 강조하던 이와쿠라 도모미 역시 프로이센의 헌법이 점진주의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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