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시찰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의 참의로서 1년 반 동안 폐변치현과 군제 개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도쿄의 들뜬 분위기에 불만을 가졌고, 정부가 상업관리소로 전락했다며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이때, 육군대보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대장대보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상인들과 결탁하여 공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가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더욱이 사쓰마 출신의 군관이 1872년부터 정부에 타이완 공격을 주장하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인 사이고 쓰구미치가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한론
한편 조선과의 관계 역시 악화 일로를 걸었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부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게 했으며 양국 간의 사안은 가운데에 있는 대마도 번주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무역도 부산에 설치된 일본 공관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하였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이 진행되자,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영토 확장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조선에 보내는 국서는 격식을 위반하기 일쑤였다.
물론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3년 5월, 부산 초량에 있는 일본 공관에 공문이 도착했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경계한 조선은 일본인들의 조선 입국을 불허하며, 조선에 오는 일본 선박이 막부 시대와 같은 구조와 모양이 아닌 경우에는 입항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 정부를 분노하게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가 정한론(일본의 아시아 대륙 진출을 위해서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나왔다. 심지어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에 먼저 사신을 보내고 그 사신이 피살당할 경우 이를 빌미 삼아 군대를 일으켜 조선을 정복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고는 본인이 직접 사절로서 조선으로 가겠다고 했다.
조선과 청을 정복하자는 것이 일본 유신 파 인사들의 공통된 주장이기는 했지만, 우선순위에서 차이를 보였다. 유럽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오쿠보 도시미치는 외부에 집중하기보다는 비스마르크가 했던 말처럼 일단 내치를 먼저 정리할 것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반대 입장에 서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정한 파가 정부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쿠보 도시미치는 혼자 힘으로는 그들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기도 다카요시와 이와쿠라 도모미 귀국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7월과 9월, 기도 다카요시와 이와쿠라 도모미가 각각 귀국하자, 일본 정부에서는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기도 다카요시는 비록 정한론을 최초로 주장한 고위 관리이기는 했지만, 그 역시 비스마르크의 의견처럼 내치를 우선시하는 데 힘을 보탰다. 시찰 당시에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언쟁을 자주 벌였는데, 이때만큼은 도시미치와 의견이 일치했다.
정변은 극적으로 발발했다. 10월 14일에 열린 내각 회의에서 이와쿠라 도모미가 우선 내치를 안정시킨 후 국외 정벌에 나서자고 주장하자,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기도 다카요시의 견해에 찬성하면서,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가 심한 언쟁을 벌여 회의는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했다. 그런데 이때, 오쿠마 시게노부가 외국인과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를 노려보며 "국가의 대사를 논의하는 와중에 외국인과의 약속 때문에 자리를 뜨겠다는 것이 국가를 위한 일인가?"라고 호통을 친 일화도 있다. 결국 그날 오쿠마 시게노부는 약속을 못 지킨 채 자리에 남아있어야 했다.
이튿날에도 두 세력 간의 언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태정대신인 산죠 사네토미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의견에 손을 들어줬다. 이 같은 결과에,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니, 17일에 조정에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정한 파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였지만, 상황은 곧 역전됐다. 산죠 사네토미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최종 결정을 하루 연기시키자 결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각파가 합의점을 찾을 생각이 없자 산죠 사네토미는 병을 이유로 사임했다. 그러자 19일 오쿠보 도시미치는 밀서를 보내 메이지 천황에게 이와쿠라 도모미를 태정대신으로 임명하라는 칙령을 발표하게끔 했다. 20일, 이와쿠라 도모미가 천황의 조서를 받들어 조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초조해진 사이고 다카모리는 22일에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내각에서 이미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답했다. 23일, 이와쿠라 도모미가 천황에게 상소문을 올리고 용단을 내려 내정을 안정시켜 줄 것을 청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참의와 육군대장, 근위도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뒤 다른 정한 파 인물들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천황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계속해서 육군대장직을 유지하길 바랐지만, 그는 도쿄를 떠나 본거지인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 수립
메이지 6년의 10월 정변은 메이지 유신 시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이 정변을 계기로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하는 '내치 파'가 정권을 잡았다. 11월 10일, 태정대신은 내무성을 설치하기로 했음을 알리며 오쿠보 도시미치가 내무경을 겸직해 일본 근대화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내무성은 국내 치안뿐만 아니라, 민간기업의 발전을 격려 및 보호하며, 호적과 토목공사, 운수, 통신 등을 모두 관리해야 했다.
대장성과 공부성을 내무성의 양 날개로 하고,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토 히로부미가 각각 책임지도록 했다. 이 세 부처가 공동으로 내무성을 주축으로 한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을 수립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서양 학문에 능통한 전 막부의 관리와 지방에서 성과를 거둔 관리들을 중앙 정부로 영입해 이들을 주축으로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써 내무성은 광범위하고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 정치체제 하에서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에 딱 맞는 근대 국가 체제를 실시하고, 경제 발전 조치를 시행했다. 이 시기를 '급진 근대화 시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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