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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18_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1)

by 티제이닷컴 2023.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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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와지 도시요시는 도쿄 경시청의 수뇌로서 가고시마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과거 유신의 영웅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에서 폭동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다.

  세이난 전쟁

 메이지 6년, 10월 정변이 일어난 후,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공직을 사퇴하고 메이지 정부를 떠났다. 메이지 유신 과정에 큰 공을 세운 그들이었지만 정부를 정한론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내치파와 대립하다가, 정부를 떠난 후에는 불평사족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개혁 방향은 사족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이 갈등은 훗날 세이난 전쟁으로 발발했다.

유신 원로들의 반란

 1874년부터 몇몇 메이지 유신 원로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 개혁이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가장 먼저 폭동을 일으킨 원로는 에토 신페이였다. 그는 초대 메이지 정부에서 참의와 사법경을 역임했다. 또한 유신 이후에는 법제 제정에 주력하여 나폴레옹 법전을 번역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근대적 법제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일본 학제의 기틀을 마련했었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로 메이지 6년에 정변이 일어났을 때, 오쿠보 도시미치와 대립하다 실각하여 관직에서 내려왔다.

 1874년 2월, 사가 번의 우국당과 정한당 5,000명 이 반란을 일으키고,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가 군대를 이끌고 사가를 점령했다. 2월 3일, 이 소식은 도쿄까지 전해졌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즉시 육군성의 구마모토 진대와 오사카 진대를 수비하던 병사를 보내 사가를 포위하고 내무경의 신분으로 반란 진화 작업에 참여했다.

 정부군은 재빠르게 사가를 점령하였고, 에토 신페이는 가고시마로 가서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같이 정한론을 외친 사이였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에토 신페이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반란을 무모한 행동으로 규정짓고 에토 신페이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그는 시코쿠로 피신했다가 고치현에서 체포됐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가에 특별 법원을 설치해서 에토 신페이를 직접 심문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과거 동료이자 메이지 유신의 공신인 에토 신페이를 냉정하게 심문한 후, 나흘 후 대역죄로 효시(죄인의 목을 베어 대중 앞에 매다는 형벌)하였다.

 메이지 정부가 1876년 3월 폐도령을 선포하고, 금록공채증서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무사 계급의 반란에 불을 지폈다. 구마모토를 근거지로 하는 무사들이 '게이신토'와 '신푸렌'이라는 정치 단체를 조직했다. 게다가 후쿠오카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예전 조슈번이었던 야마구치현, 하기성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하기성은 요시다 쇼인이 사학 쇼카손주쿠를 설립한 곳이었으며, 이 반란을 주도한 인물은 요시다 쇼인의 제자이자, 메이지 정부에서 제2대 병부대보를 역임했던 마에바라 잇세이였다. 그는 정부에서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와 관계가 좋지 않아서 퇴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때마침 요시다 쇼인의 조카도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그 역시 정한론을 주장했다. 징병제와 봉록 철폐에 대해 반대를 외치는 야마구치현의 사족들 역시 마에바라 잇세이와 가까이하였다. 10월 하순, 200여 명의 반란 세력이 제련 공장에서 무기와 탄약을 탈취해 야마구치현을 공격하려 했지만, 정부군에 진압당했다. 마에바라 잇세이 역시 시마네현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세이난 전쟁 전, 가고시마

 이 반란 후, 전국에 퍼져 있는 사족들의 관심이 가고시마로 향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도 가고시마를 예의 주시했다. 가고시마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태도와 육군 대장으로서의 명성이 결국 전국에 있는 사족들의 행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관직에서 물러나 가고시마로 돌아간 후, 사립학교와 요시노 개간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사립학교는 사격대 학교와 포대 학교로 구성되었다. 사쓰마번 근위병 출신으로 과거 천황을 경호하던 근위대가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라 가고시마로 함께 돌아간 후 그의 사격대 학교에 포진해 있었다. 사립학교에는 학생이 총 600명 정도 있었다. 그중 포대가 대략 200명으로 대부분 과거 번군의 포대 출신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보신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받은 2,000석의 봉록으로 보신 전쟁 때 전사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설립했고, 사쓰마번의 공신인 오쿠보 도시미치도 1,800석의 봉록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립학교 학생들을 양성하기 위해 요시노 개간사를 운영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같은 사쓰마번 출신으로 가고시마 사족들의 특수한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봉록 처분 문제에 있어서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가고시마 사족들에게 10년짜리 질록(지위에 따라 지급되는 봉급) 공채와 10퍼센트의 이자를 지급했다. 

 이 때문에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기도 다카요시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본인의 출신지인 가고시마에만 부당하게 큰 특혜를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가고시마에만 특혜가 지속될 경우 다른 지역에 있는 사족들이 불만 없이 가만히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1876년,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현의 현령인 오쿠마 츠나요시에게 현청의 관리들을 교체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오쿠마 츠나요시는 이 명령에 불응하였고, 그러자 사태가 더 악화될 것을 미리 걱정한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 명령을 곧장 철회했다.

세이난 전쟁을 일으킨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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