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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17_경찰 제도 개혁과 무사 계급의 몰락

by 티제이닷컴 202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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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6년(1873년)은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한 해였다. 그해 일본 역사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고, 또 많은 유학생이 유럽과 미국에서 귀국해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경찰 제도 수립, 국내를 다스릴 수단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구미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이자 10월 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9월, 가와지 도시요시도 구미 시찰을 마치고 귀국했었다. 그는 경찰 제도 관련하여 담당하고 있었다.

 폐번치현을 실시하기 전 일본의 경찰과 군대는 구분이 모호했다. 군대도 일상적인 치안 관리에 참여해 도쿄의 경찰을 '부병'이라고 부르고, 전국 각지에 현병과 구병이 있었다. 1871년 이후, 전국적으로 경찰의 명칭이 나졸로 바뀌었다. 1872년에는 사법성 내에 경보료를 설치해 전국의 경찰을 통일적으로 지휘하게끔 했다.

 가와지 도시요시는 각국의 경찰 제도를 시찰한 후 조정에 경찰 제도 개혁에 관한 내용을 제출했는데, 그는 이 의견서에서 군주 독재 국가는 반드시 군주권을 강화해야 하며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프로이센, 프랑스처럼 국가가 직접 순경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군대는 대외적이고, 경찰은 대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는 곧 한 가정과 다름없으며, 정부가 국민의 '부모'이고, 경찰은 '보모'라는 개념의 '가장식 보호주의'를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와지 도시요시는 서양의 경찰 제도를 본떠 행정 경찰과 사법 경찰을 분리했다. 행정 경찰은 내무성의 지휘를 받아 수도 경찰의 임무를 수행했고, 내무성의 책임자인 경시청 장관이 통솔하도록 하며, 사법 경찰은 사법경이 지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내무성경으로 임명된 후, 전국으로 경찰 제도 수립에 착수했다. 과거 사법부에 속했던 경보료를 내무부 소속으로 바꿨고, 자신이 전국 경찰의 수뇌부를 차지했다. 1874년에는 도쿄 경시청을 설립했고, 가와지 도시요시를 초대 도쿄 경시청 대경시로 임명해 수도인 도쿄의 경찰권을 관리하도록 했다. 나졸이라는 종전 명칭을 경찰로 고쳤으나 당시 경찰은 주로 봉건 시대 무사 계급이 담당하였다.

 가와지 도시요시의 노력과 당국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은 '경찰국가'가 되었다. 이로써 수도인 도쿄를 제외한 전국에 방대한 경찰망이 조직되었다. 각 관할 지역을 2~3만 가구 단위 정도로 하여 몇 개 구로 나누었으며, 구마다 경찰 파출소를 설치해 경찰 수십 명을 상주시켰다.

 메이지 시대 중엽인 1890년, 일본 전역에는 692개의 경찰서와 774개의 경찰 분서 및 1,400개의 경찰 파출소가 있었다. 다시 말해 평균적으로 3개 촌에 하나씩 경찰 주재소가 있는 셈이었다.

일본 경찰 제도를 개혁한 가와지 도시요시
일본 경찰의 아버지 '가와지 도시요시'

무사 계급의 몰락, 자본가의 등장

 메이지 유신 실시 초기, 일본에는 40만 명의 무사가 있었다.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 이들은 처치 곤란한 세력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군제를 개혁한 후, 봉건 사족들이 가지고 있던 군사 특권을 취소하였고, 1876년에 '폐도령'을 선포한다. 즉 검을 휴대할 수 있고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무사들의 특권이 폐지된 것이다.

 각 번이 난립하는 시기에는 무사들이 국가의 봉록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폐번치현이 실시되면서 정부가 봉록제를 개혁했다. 메이지 6년에 화족(과거 다이묘 계급)과 사족 가운데 관직이 없는 사람은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그들에게 봉록을 군가에 헌납하게 하는 대신 보상금과 공채를 지급했다. 그러나 2년 후 사족 가운데 3분의 1만이 봉록을 헌납하였고, 실제로 헌납한 가록(집안 대대로 세습된 녹)은 4분의 1에 불과했다. 이 방법은 정부의 재정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가록 지출은 정부 재정 3분의 1을 차지했다. 정부는 부득이하게 외채를 도입해 가록을 헌납한 무사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부담이 가중되어 더 이상 지불할 여건이 안 되자, 오쿠보 도시미치는 무사들의 가록을 아예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1876년, 오쿠마 시게노부가 화족과 사족에게 봉록을 화폐로 지급하는 금록공채 증서를 발급하고, 가록을 모두 회수한다. 같은 해 8월, 정부가 봉록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 봉록을 헌납하게 하고 국가가 증서를 발급하는 한편 화폐 봉록을 강제로 공채로 전환했다. 이로써 전체 사족 가운데 4분의 3이 공채를 받았고, 가록은 모두 몰수당했다. 이는 방대한 무사 계급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다.

 한편, 정부가 공채권을 은행 채권으로 교환할 수 있게끔 하자, 많은 사족의 투자로 일본 내의 은행은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거액 공채를 보유한 화족과 사족들이 자금을 수령해 상공업에 투자했는데, 이 가운데 사족이 차지한 비율은 4분의 3에 달했다. 훗날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고다이 도모아쓰, 이와사키 야타로, 후지타 등이 모두 사족 출신의 대자본가였다.

 무사 계급은 분열되어 기업주나 자본가, 공무원, 경찰, 교사가 되었다. 일부는 수공업자와 농민으로, 대부분은 무산 계급으로 전락했다. 이는 훗날 사족들이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킨 근본적 원인이 된다. 정한론 역시 이들 계급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들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전투가 필요한데 통일이 된 일본 국내에서는 쉽지 않았지만,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은 그들의 이해타산과 부합하는 주장이었기에 그들이 정한론을 지지하는 건 생존권이 달린 선택이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자신들이 설 자리를 확보하고 사족 전제 체제 확립을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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