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소득 배증 계획
1950년대 말, 도쿄의 한 식당에서 이케다 하야토와 몇몇 학자들이 정기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이케다 하야토의 싱크탱크인 '고치카이'의 주 1회 정기모임이었다.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 경제 정책을 주도해 온 주요 경제 관료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성을 주관하며 통산상과 경제심의청 장관을 역임했다.
바로 이때, 젊은 경제 전문가인 시모무라 오사무의 주장이 이케다 하야토의 관심을 끈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아직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시모무라 오사무는 일본 경제의 두 자릿수 성장을 예측했다. 이케다의 경제 자문인 다무라 빈고는 그를 이케다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정부 계획안에 명시할 숫자를 둘러싸고 시모무라와 다무라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시모무라는 11퍼센트로 적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무라의 입장은 다소 보수적이어서 7.2퍼센트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고집했다. 둘의 의견을 모두 들은 이케다는 전반기 3년간은 9퍼센트의 성장률을 달성하고, 10년 동안 7.8퍼센트 이상으로 유지하며 10년 안에 국민 소득을 2배로 증가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1960년 7월, 기시 노부스케가 퇴임한 후, 이케다 하야토가 압도적 우세로 자민당 총재로 당선되었다. 오히라 마사요시와 미야자와 기이치의 건의로 1960년 12월 27일, 일본 내각 회의에서 '국민 소득 배증 계획'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일본 경제에 거시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케다 하야토와 당시 일본 정계 인사들은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 우선적 노선을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기시 노부스케는 미일 안보 조약에 서명한 후 들끓는 여론의 비난에 못 이겨 허둥지둥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 자민당의 후임자는 이런 상황에서는 경제 우선 정책을 채택해야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단 걸 깨달은 것이다.
1960년대, 일본의 경제 성장과 소비 증가
일본 경제는 1955년 이후에도 고속 성장세를 유지했다. 1955년에 시작된 '진무 경기(초대 천황인 진무 이래의 호황)' 기간에는 연간 GDP 성장률은 12퍼센트를 웃돌았다. 이후 소비가 증가하더니 1957년부터는 3대 소비품인 세탁기, 냉장고, 흑백 TV가 일반 가정에도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가정용 공산품의 증가율을 살펴보면, TV가 47배, 냉장고가 24배에 달했으며, 보통 근로자의 두 달 치 월급이면 TV 한 대는 살 수 있었다. 일본에 본격 소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일본 경제에 장장 42개월간 호황이 지속되어 진무 경기를 크게 웃도는 제2의 호황기가 찾아왔다. 이 시기의 호황을 '이와토 경기'라고 부르는데, '이와토'란 일본의 건국 신화 속에 등장하는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천지개벽을 가져온 대번영이라는 의미였다. 이 기간에 해마다 GDP 성장률은 10퍼센트를 넘었고, 경제구조에 큰 변화가 발생해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생산이 많이 늘어났다.
철강, 기계, 전력 분야에서 투자가 또다시 투자를 유발하는 선순환이 일어나며 임금이 상승함에 따라 식품의 비중이 감소하는 대신 소비품과 오락, 사교 비용의 비중이 늘어나 소비의식이 높아졌다. 또한 볼링, 골프, 스키, 여행 등 여가생활이 늘어나 관광지마다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생활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회적인 풍조가 확대되어 '대중 소비 사회'로 접어들었다. 한편 소비의 질적 향상도 이루어져 절반에 가까운 국민들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64년에 개통된 신칸센, 일본 인프라 발달의 상징
국민 소득 배증 계획은 야심 찬 계획으로 사회 자본 확대, 산업 구조의 고급화, 무역 및 국제적인 경제 협력 추진, 노동력의 수준 제고 및 과학 기술 진흥, 이중 구조 해소 및 사회 안정 확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일본 정부는 이 중에서도 사회 자본 확대에 가장 주력한다. 기본적으로 산업의 기초를 정비하고 개선했다. 도로, 항구, 철도, 공항, 통신, 공업 용지 및 용수, 농림수산의 현대화에 아낌없이 투자하여 과거 5년간 투자액의 4.2배에 달했다. 공공투자와 사업을 총괄하는 공사와 공단, 사업단들이 속속 생겨나고, 정부가 전액 부담하거나 지방과 민간 부문이 공동 부담하는 형식으로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계획의 우수한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1964년엔 도쿄에서 오사카에 이르는 시속 200킬로미터의 도카이도 신칸센이 도쿄올림픽 개최 9일 전에 개통되기까지 했다. 이로써 도쿄에서 오사카에 가는데 4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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