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학/일본

[일본 근현대사]#56_1950-60년대 도쿄 올림픽, 베트남 전쟁 특수를 맞이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1. 28.
728x90
반응형

 도로 건설 분야에서는 나고야-고베 간 고속도로가 전면 개통되었고, 승객 및 화물 육상 운송이 빠르게 보급되었다. 항공 분야에서도 지방 항로가 개설되었으며 해외 항로 역시 점점 증가해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국내선과 국제선에 제트기화가 실현되었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


 일본의 산업 구조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중화학 공업의 국제 경쟁력은 시간이 갈수록 향상되었다. 일본의 철강 생산량이 서독을 초월해 세계 3위로 올라섰으며, 자동차 생산량도 미국, 영국, 서독의 뒤를 이어 세계 4위까지 올라갔다. 1963년 중화학 공업이 공업 고정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퍼센트에 달했고, 수출 비율은 1965년에 62퍼센트까지 증가했다. 세계 선진 수준의 최신 설비를 도입한 후 일본은 경제 고속 성장에 부응할 수 있는 중화학 공업 생산 체제를 수립했으며, 중화학 공업의 국제적인 위상을 신속하게 향상했다.

 이케다 하야토 내각은 대내적으로 국민 소득 배증 계획을 실시하는 한편, 대외적 경제 관계에 있어서는 무역 및 외환 관리 자유화를 실시했다. 1955년 일본이 GATT(제네바 관세 협정)에 가입했을 당시, 일본의 무역 자유화율은 16퍼센트에 불과했으나, 1960년에는 40퍼센트까지 상승했다.


50~60년대 일본의 성장과 미국의 압박

 일본은 자국의 산업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엄격한 수입 제한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1960년대 세계 경제에 변화가 생기고 일본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자, 다른 나라들은 일본이 이미 중진국 대열에 올라섰으므로 무역과 외환 분야를 제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서유럽 각국도 이미 무역 자유화를 시행하고 있는 데다가 유럽 경제 공동체(EEC)가 설립된 후, 각 회원국이 점차 관세 및 무역장벽을 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의 압력이었다. 미국은 1958년 당시 일본 경제에서의 지위가 이미 상대적으로 하락해 공산품 수출 비중이 38퍼센트에서 22퍼센트까지 하락했다. 1959년에는 일본의 대미 무역이 급속히 확대되자 미국은 일본에 무역 자유화 실시를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일본은 세심한 분석과 정확한 판단을 통해 주도면밀한 모습으로 경제 개방을 실시했다. 일본 경제가 수입 할당제에 의지한 폐쇄 체제였기 때문에 경제 개방에 대해 많은 일본인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값싼 외국 제품이 유입되면 일본 기업들이 가격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경제 성장의 동력이던 폐쇄적 경제 체제를 과감히 버리고 산업 질서를 재편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자유화가 일본 경제에 다소 타격을 미치긴 하겠지만, 전반적인 효율성 증대와 같이 그에 따른 경제적 이점 역시 클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 자국 내 기업에 세계적인 선진국들과 국제 시장에서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은 기술 혁신과 원가 절감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의도적으로 철강, 자동차, 석유 화학 등 경쟁력이 약하다고 판단되는 산업들을 지원하려 했지만 야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많은 일본 기업이 자신의 국제 경쟁력에 이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그 이유이다.

 1965년, 일본에서 승용차에 대해 수입 자유화가 시행된 이후, 수입 제한품목이 122종으로 크게 줄어들어 무역 자유화 수준은 이미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섰다.


일본 경제 특수; 도쿄 올림픽과 베트남 전쟁

 1964년, 도쿄에서 제10회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후두암의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쉰 목소리로 올림픽 환영사를 낭독했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반도체 외판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이 총리는 그 후 암으로 일본 정계를 떠나고, 총리직을 사토 에이사쿠에게 넘겨주었다. 

'올림픽 특수'가 끝난 후, 사토 내각이 장기 집권하는 동안 국민 소득 배증 계획도 꾸준히 실시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1965년부터 1970년까지 57개월 연속 장기 호황기를 누렸다. 이 호황기는 일본 신화의 건국신인 이자나기 노미코토의 이름을 따서 '이자나기 경기'라고 명명되었으며, 이 시기에 일본은 명실상부한 경제 대국의 지위를 확립한다.

 1960년대 세계 경제를 살펴보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적극적인 성장 정책을 추진하였고, 그로 인해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8년여 동안 호황기를 맞이하였으며, 이런 국제적인 경기 호황이 일본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촉진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부추긴 중요한 요인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베트남 본토에서 일어난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미국의 후방 기지로서 미국에 각종 군수물자,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한편, 동남아로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