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67 [일본 근현대사]#32_근대적 헌법 반포, 메이지유신 1887년 12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제정을 보장하기 위해 2부 18현의 민권대표 90여 명이 원로원에 제출한 요구안을 탄압하기로 결정했다. 17일,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집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도쿄 경시청 총감인 미시마 미치쓰네가 진압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했다. 반대파를 짓눌러 헌법 제정을 준비하다 12월 26일, 정부는 '보안 조례'를 발표하고 비밀 결사와 실외 집회, 내란을 조장하는 서적 및 선전물 인쇄를 엄격히 금지하고, 12킬로미터에 달하는 황궁 구역 내에서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의 거주와 체류를 금지했다. 이 밖에도 570명을 추려 1~3년간 도쿄에서 추방하고, 경찰의 명령에 저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밀명을 내렸다. 군대에 군용 전화선을 매.. 2024. 1. 8. [일본 근현대사]#31_입헌 군주제와 독일식 군제 개편, 메이지 유신 1884년,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기구인 '제도 조사국'을 설치하고, 자신과 똑같이 독일 헌법을 지지하는 이노우에 고와시에게 초안 작성을 맡겼다. 이는 군주의 권력이 강하고 정당의 권력이 제한적인 국가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헌법에 적응하기 위한 일련의 체제 개혁을 실시하였다. 일본의 입헌군주제 이 같은 체제 개혁에서는 천황의 대권이 그 핵심에 있었다. '헌법' 이외에도 이토 히로부미가 황위 계승, 황족의 명분, 황실 재산 등에 관해 규정한 '황가전범'이 있었고, 황실에 관련된 일은 헌법과 국무, 의회를 초월했다. 또 이토 히로부미는 정당으로 구성된 중의원을 견제하기 위해 중의원보다 권력이 강한 기관으로 귀족원을 두었다. 귀족원의 관리들은 민선.. 2024. 1. 8. [일본 근현대사]#30_근대 헌법 제정, 메이지 유신 메이지 천황이 신임하는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을 때, 그 앞에 놓인 가장 큰 문제는 나날이 고조되고 있던 민권 운동이었다. 자유 민권 운동은 민권을 확보하려는 자산 계급 운동으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자마자 일본 정치계에서 주요 세력을 형성했다. 그것은 메이지 유신의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를 주장한 자유 민권 운동은 1870년대에서 1880년대에 이르는 세월 동안 헌법 제정을 실현하게 한 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 동양의 비스마르크를 자처해 온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제정이라는 역사의 막중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의회 설치, 여론을 존중하는 개명 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 2024. 1. 5. [일본 근현대사]#28_메이지 유신, 도쿄 대학 설립 이노우에 고와시는 문부대신으로 재직한 1890년부터 1894년까지 일본의 산업 발전과 직업 교육을 위해 '실업 보습 학교 규정'과 '도제 학교 규정', '실업 교육 국고 보조법', '간이 학교 규정'을 제정했다. 이들 법안은 근대 산업 기술의 기본 지식과 기술을 지닌 기술 인재와 노동자를 양성하는 데 법률적인 기초를 제공했다. 1894년에 열린 제6회 의회에서 이노우에는 "포화가 없는 경쟁이기는 하지만, 지구상의 각국이 기술과 제조, 무역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라도 태만하면 나라의 부강과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법률적인 지원 아래 메이지 중후반에는 직업 교육 체계가 형성되기도 했으며, 일본 제조업의 발전에 탄탄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1900년.. 2024. 1. 4. 이전 1 ··· 3 4 5 6 7 8 9 ···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