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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8

[러시아사]#55_대공황 이후 몰락한 자본주의 국가와 추월하는 소련 세계 대공황으로 붕괴한 자유주의 진영과 대비되는 소련의 상황 1930년대 초반,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붕괴하였을 때, 사회주의 노선인 소련은 그 타격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덕분인지 소련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서방 국가가 수백 년에 걸쳐 완성했던 공업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 뒤에는 그늘진 대가가 있었다. 빠른 발전에 가려진 문제가 심각했다. 소련은 농업의 정상적인 발전을 무시한 채 중공업과 군수 산업의 성장만을 도모했기에 경제 발전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모든 경제생활을 통제한 국가가 시장 조절 작용을 무시한 탓에 나라는 강해졌지만 국민들의 생활은 여전히 곤궁했다. 이처럼 제때 해결되지 못한.. 2024. 3. 8.
[러시아사]#50_소련의 신경제 정책과 미국인 '아먼드 해머' 신경제 정책의 의의 레닌은 신경제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산업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사유 재산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공장으로 돌아가 10~15년 안에 공장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해주시오." 하지만 자신들의 공장으로 돌아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대기업은 정부가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신경제 정책으로 무역은 활기를 되찾았다. 신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동안 개인이 운영하는 기업은 무역업의 50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공업 분야에서는 개인 기업의 비중이 고작 18퍼센트에 그쳤다. 레닌은 자본이나 은행을 착취의 산물이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의 차용 기업은 허락했다. 미국인 기업가인 해머가 이에 적극 동참했지만, .. 2024. 3. 3.
[러시아사]#47_전시 공산주의와 러시아 내전(적백내전)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시 공산주의 처칠은 영국의 육군 장관에 재임할 당시 볼셰비키를 요람에서 죽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한 경제학자인 케인스는 러시아의 터진 곳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력뿐이라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소비에트 연방은 승자의 대우를 받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에 휘말려야 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러시아를 공격해 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국가는 러시아에 무장간섭을 시작했고,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를 중심으로 하는 백군(반 볼셰비키군)은 신정권을 공격해 왔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전역은 불길과 연기로 뒤덮였으며, 적군이 많을 때는 동시에 24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 비해 러시아의.. 2024. 3. 2.
[러시아사]#46_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의 행보, 레닌과 마르크스 주의 10월 혁명 이후의 행보 러시아의 민족들이 10월 혁명 이후 5년이나 고난의 투쟁을 하며 선진 공업 국가의 침략과 간섭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승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은 평등과 정의,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 제도에 대한 갈망이었다. 10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의 정권은 소비에트로, 평화와 토지는 국민들에게로 돌아갔다. 혁명 이틀째, 소비에트는 첫 번째 법령인 평화 법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을 통해 교전 중인 국가에 평화 협정을 제안하면서 영토 할양과 배상을 하지 않는 방안을 함께 제안했다. 두 번째로 공포한 것은 토지에 관한 법령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토지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 노동량과 소비량에 맞추어 노동자에게 토지를 지급했다. 러시아.. 202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