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내전4 [영국]#34_크롬웰의 생애와 크롬웰 관점으로 본 영국내전 크롬웰의 생애 1599년, 크롬웰은 잉글랜드 헌팅던의 평범한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며 청교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대학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 20여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조세와 법률을 공부하며 지냈다. 이때까지 크롬웰은 전혀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열 명이 넘는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1628년과 1640년에 각각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영국 내전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지 않았더라면, 크롬웰은 아마도 가난한 시골 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40세가 넘도록 단 한 번도 군인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그때까지는 누구도 그에게서 군사 영웅의 기질을 발견.. 2024. 7. 26. [영국]#31_찰스 1세의 죽음 이후의 영국과 크롬웰 찰스 1세 처형 이후의 영국 찰스 1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진 후, 한 소년이 그의 머리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보세요! 반역자의 머리예요!" 이 장면을 목격한 어느 성직자는 비통함과 회한으로 가득 찬 글을 남겼다. "소년은 국왕의 존귀한 머리를 마귀의 머리처럼 집어 올렸다. 관중은 미친 듯이 아우성을 질러댔다. 마치 지옥에 온 것 같았다. " 국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 영국에 퍼지자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크롬웰 경이 군대를 장악한 뒤 의회를 압박하여 저지른 국왕 처형 사건은 민심을 잡진 못했다. 로렌스 에카드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부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른 것은 그들이 끝까지 국왕과 맞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국왕의 머리를 높이 쳐들자 군중 .. 2024. 7. 21. [영국]#28_영국내전의 끝, 의회는 승리하고 찰스 1세는 처형당하다 영국 내전, 왕당파 vs 의회파 1642년 8월 22일, 결국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날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깃발을 높이 쳐들고, 국왕을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킨 의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장장 6년에 걸친 영국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승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의회의 군대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국왕의 지지자들은 모두 영국국교회의 수호자들이었고, 의회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청교도였다. 이 전쟁은 흡사 종교전쟁처럼 보였지만 전쟁의 근본 원인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라의 최고 권력을 누가 장악하는가의 문제였다. 국왕인가.. 2024. 7. 18. [영국]#26_찰스 1세, 영국내전의 전초전 영국, 내전의 바람이 불다 왕권의 본질에 반대하는 것은 곧 전제정치를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국가에서 정치적 기반이 되는 필수 요소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적은 수업료를 내고 고도의 정치적 실험을 한 셈이었다. 햄던 사건으로 국왕의 권위가 실추된 데다 고갈된 재정을 채울 길마저 막막해진 상태에서 찰스 1세는 또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만약 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찰스 1세는 그의 아버지처럼 모든 책임을 후계자에게 물려준 채 조용히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전쟁은 바로 찰스 자신의 어리석음이 발발한 것이었다. 찰스 1세는 당시 청교도가 장악하고 있던 의회와 갈등하는 상황에서 장.. 2024. 7. 1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