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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26_찰스 1세, 영국내전의 전초전

by 티제이닷컴 2024.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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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전의 바람이 불다

 왕권의 본질에 반대하는 것은 곧 전제정치를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국가에서 정치적 기반이 되는 필수 요소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적은 수업료를 내고 고도의 정치적 실험을 한 셈이었다.

 햄던 사건으로 국왕의 권위가 실추된 데다 고갈된 재정을 채울 길마저 막막해진 상태에서 찰스 1세는 또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만약 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찰스 1세는 그의 아버지처럼 모든 책임을 후계자에게 물려준 채 조용히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전쟁은 바로 찰스 자신의 어리석음이 발발한 것이었다. 찰스 1세는 당시 청교도가 장악하고 있던 의회와 갈등하는 상황에서 장로회인 스코틀랜드에 국교회를 강요하여 전쟁을 도발함으로써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1639년, 재정난에 허덕이던 찰스 1세는 결국 스코틀랜드에 화해를 요청했다. 그렇게 쌍방은 휴전에 들어갔지만, 이러한 종결 방식은 교만한 국왕의 성격에 절대 부합되지 않았다. 그리고 확고한 신앙을 위해서도 그는 갈 데까지 가봐야 했다. 사태는 결국 국왕 자신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파국으로 치달았다.

 1640년,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 자금을 끌어모으던 찰스 1세는 자신의 의지대로 스코틀랜드인을 복종시키기 위해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전쟁 비용을 충당할 방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11년 동안이나 굳게 닫아두었던 의회의 빗장을 풀었다. 그는 오랜만에 소집된 의회에서 군비 조달을 위한 세금 징수 문제를 거론했다.

 그러나 의회는 그동안의 폭정을 중지하지 않으면 세금 징수에 관해 토론하지 않을 것이라고 국왕을 압박했다. 찰스 1세는 이성을 잃고 격분하여 국왕에 대한 성토장이 된 의회를 또다시 해산해 버렸다. 이 의회는 고작 3주 만에 끝나버렸기에 '단기의회'라고 불린다.

 이렇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위기가 닥쳐왔다.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된 것이다. 찰스가 전쟁을 지속할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자 그의 군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급할 때까지 전쟁을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불행하게도 국왕은 단돈 1펜스조차 빌릴 곳이 없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찰스 1세는 결국 다시 의회를 소집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에 또다시 의회가 열렸다. 이 의회는 그 후로도 20여 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장기의회'라고 불리며, 후세 사람들에게는 혁명이 시작된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

 이번 회기에도 의회는 국왕의 부채를 떠안으려 하지 않았다. 의원들은 의회가 열리자마자 찰스 1세에게 전제정치를 청산할 것을 종용했다. 의회는 먼저 국왕의 오른팔인 스트래퍼드 백작과 로드 대주교를 체포한 뒤 스트래퍼드 백작을 반역죄로 판결해 사형을 선고했다.

 1641년 5월 12일, 스트래퍼드 백작은 20만 명의 분노한 런던 시민들이 에워싼 가운데 참수형에 처했다. 곧이어 일어날 내전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 셈이다. 찰스 1세의 통치 시대는 이렇게 내리막길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후 의회는 모든 세금은 의회의 비준을 반드시 거쳐야만 징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재천명하며 일련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특히 3년마다 한 번씩 의회를 개최한다는 '3년 회기 법'을 통해 의회의 정기 소집을 필수 규정으로 합법화했으며, 국왕의 의회 해산권을 없애도록 명시했다.

 찰스 1세가 이렇게 대폭 양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일부 의원들은 왕권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1641년 11월, 의회는 이들 강경파 의원이 찰스의 실정을 고발하기 위해 제출한 '대간의서'를 통과시켰다. 찰스 1세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결심하고 국왕의 위엄을 수호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찰스 1세와 의회의 분쟁

 찰스 1세의 정책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이 때문에 재위 동안 의회에서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고, 국민들은 그가 타협하거나 정책을 포기하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찰스 1세는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1629년부터 11년 동안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는데, 이는 의회가 자신에 대해 비판만 늘어놓는 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찰스 1세는 반대의견에는 절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아주 독단적인 사람이었다. 의회도 개최하지 않은 채 전횡을 일삼아 의회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존 햄던 사건의 의의

 존 햄던 사건은 그것이 비범한 결과를 끌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 판결은 당시 영국 사법부의 최고 권위자 12명의 투표로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7명은 국왕을 나머지 5명은 햄던을 지지했다. 재판 결과가 공포되자 국왕의 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왕권의 합법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물론, 법적으로 승리한 셈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엄청난 재난에 해당했다. 12명의 법관 중 무려 5명이나 국왕에게 반대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오늘날 런던의 모습
오늘날 런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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