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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24_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

by 티제이닷컴 202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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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왕위에 오르다

 1625년,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젊은 국왕은 부왕의 명석함보다는 오히려 '왕권신수설'을 제창했던 부왕의 고집을 물려받았다. 그는 약간의 말더듬이에다가 매사 우유부단했지만, 왕권신수설을 통치방침으로 삼으면서 독단적인 군왕이 되었다.

 찰스 1세가 '국왕의 권력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정치에 반영하면서부터 그와 잉글랜드는 일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 혼란은 찰스 1세가 처형된 후에도 몇십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영국은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으며, 이 나라가 역사의 파도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을지는 국왕의 능력과 지도력에 달려 있었다. 결국 이 범선의 선장인 찰스 국왕이 국가의 운명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찰스 1세는 유능한 선장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일등 항해사인 의회와도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다. 잉글랜드 호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찰스 1세 vs 의회

 이 시기는 '마그나 카르타'가 공포된 지 400여 년이 지난 때였다. 그 400년 동안 잉글랜드에는 여러 왕조가 거쳐 갔고, 무려 17명의 국왕이 이 나라를 다스렸다. 잉글랜드의 군주제도 점차 전제군주제로 바뀌어 갔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 때 최고조에 달했고, 영국의 국가적 통일도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왕권이 점점 강해질수록 귀족, 성직자, 젠트리(소지주 또는 중간계층)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도 국왕과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그만큼 같이 발전해 갔다.

 영국의 역사에서 최초의 '의회'에는 기구의 의미가 내포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중대사가 있을 때 국왕과 귀족들이 함께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모임이었다. 의회가 기구화된 이후에도 초창기에는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단지 국왕을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하거나 귀족들의 토지 문제를 해결하는 정도였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가 반포된 이후부터 400여 년에 걸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권력과 영향력이 확대된 의회가 세금 징수권을 통제하게 되면서 국가의 재정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국정에 대한 발언권도 점차 강해졌다.

 국왕과 의회의 힘은 비등하게 성장하다가 찰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의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찰스 1세는 개인적으로 도덕을 저버린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의 요구와 역사의 대세가 충돌하면서 국왕으로서의 삶이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왕권과 의회 간의 권력 대립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국왕과 의회의 첫 번째 대립은 찰스 1세가 즉위한 지 3개월 만인 1625년인 6월에 발생했다. 갈등의 도화선은 세금 문제였다. 찰스 1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곧 재정 위기에 봉착했다. 영국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프랑스와 복잡하게 얽혀서 벌인 종교전쟁 때문에 재정이 고갈되고 국고가 바닥난 것이다. 결국 두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계속하자면 막대한 군사비를 국왕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당시에는 왕실이 정부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왕국 내의 모든 일을 국왕이 책임져야 했다.

 그렇다면 찰스 1세는 이 비용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당시 유럽에는 중세 때부터 내려오는 관례가 있었다. 국왕도 자신의 생활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왕의 주요 소득원은 왕실 영지로부터의 수입, 법원에서 징수하는 벌금, 도시에서 납부하는 세금 등이었다. 영국에서 국왕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세수였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찰스 1세가 택한 방법 역시 세수를 증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마그나 카르타'와 의회의 견제 때문에 마음대로 세금을 올릴 수가 없었다.

 같은 해 6월에 소집된 의회는 찰스 1세가 스페인,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요청한 세금 징수권을 비준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전의 국왕들에게 부여되었던 관세 부과에 대한 종신 특권마저 박탈해 버렸다. 대신 국왕은 1년에 한해 관세를 부과할 수 있으며, 그것도 매년 의회 표결에 의한 동의를 거쳐야만 계속 징수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눈부신 성취와 왕권신수설의 미몽에 젖어있던 찰스 1세는 극도로 분노했다. 국왕의 권력은 하나님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누구도 국왕의 권력 위에 올라설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던 찰스였다. 이미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에도 그는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왕권 신수의 교조를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명확한 신념으로 사수하고자 했다. 이후 역사에서 보듯이, 그는 실제로도 이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생명을 대가로 내놓을 수도 있었다.

찰스 1세
찰스 1세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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