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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22_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한 영국

by 티제이닷컴 202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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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의 황금기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 중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영국 역사상에서도 가장 민심을 사로잡은 통치자로 꼽힌다. 그녀는 오랜 재위 동안 한결같이 다양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신교도를 지켜주었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해상권 보호에도 적극적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대항하는 것을 지원함으로써 그 나라 국민의 자유까지 지켜준 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권위적인 군주였지만, 폭군도 전제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공인된 법률과 상식에 따라 나라를 통치했다. 여왕은 의회를 자주 열었으며, 말년에는 매년 소집했다. 엘리자베스는 대다수 사람, 특히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사람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정책에 반영하기도 했다. 대체로 여왕의 생각은 대다수 국민의 요구와 맞아떨어져 그녀는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왕으로 인식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군을 확충하여 식민지를 개척했다. 버지니아, 그곳이 바로 여왕의 첫 번째 식민지였다. 그녀는 국가체계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조율한 군주였다. 사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와 초기의 스튜어트 왕조시대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를 '베스 여왕의 황금기'라고 부르며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 시대는 또한 영국 역사상의 황금기로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와 작품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통치 색깔이 적지 않게 가미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통치기의 재정, 종교 문제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초기에 군주제도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재정 문제였다. 나라에 돈이 없으니 국왕은 자신의 사재를 털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하나는 16, 17세기에 걸쳐 불거진 종교 문제였다. 1530년대에 로마 가톨릭 교단에서 분리된 이후, 영국은 신교 국가가 되었다. 이는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문제는, 과연 어떻게 신교 국가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16세기에는 신교도들 간에도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개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미 본질에서 너무 많이 지나쳐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16세기에는 당장 전쟁이라도 벌일 수 있는 사안이었다.


엘리자베스 통치 말기의 문제

 여왕의 통치 말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1590년대 이후에는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의 무일푼이 되어 버린 채, 노쇠해졌다. 아버지 헨리 8세나 할아버지 헨리 7세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지만, 실제로는 유명무실한 고령의 군주일 따름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불안 요소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 사회는 변혁을 겪는 가운데 중산계급의 부가 점점 축적되어 갔다. 이들 부유한 중산계급이 엘리자베스 1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왕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사회 권력이 이미 왕실과 귀족계급에서 중산계급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이와 같은 변화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때부터 중산계급은 왕권에 대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충성심을 보이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통치기의 종교적 갈등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영국에는 긴장 국면이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신교도들이 좀 더 급진적인 종교 형식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가톨릭을 극렬하게 반대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가 세운 영국국교회가 가톨릭에 너무 관대하다고 성토했다. 이러한 긴장 국면은 당시 경제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총체적인 경제와 해양 경제는 확장 추세에 있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독점무역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물론, 이런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후였다. 50년 후, 바로 이 이유로 영국에서는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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