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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19_국가가 공인한 해적들, 드레이크와 호킨스

by 티제이닷컴 2024.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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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해양 탐험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초기에 유럽 대륙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해가들이 탐험에 성공해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새로운 상업시대에는 해로를 개척하는 것이 육로를 개척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섬나라 민족의 특성상 영국인은 이러한 이치를 다른 민족보다 먼저 터득하고 있었다.

 영국은 어느 곳에서든 해안선까지의 거리가 120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 영국이 갖고 있는 이 지정학적인 장점이 효력을 발휘할 역사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영국의 해상무역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이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여왕은 상인들에게 권한을 위임해 무역회사를 설립하게 하고 직접 자본금을 투자했다. 또한 해상무역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왕실 특허장을 교부했으며, 상인과 탐험가들이 해상활동에 제약받지 않도록 각종 특권도 부여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이익으로 설립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동인도회사이다.

 셈에 능했을 뿐 아니라 대담하기까지 했던 당시의 런던 상인들은 해양 탐험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발 빠르게 결단을 내린 결과였다.


국가가 공인한 해적, 드레이크

 1580년,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영국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했다. 항해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이 모험가는 여왕에게 16만 3,000파운드에 달하는 이윤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고귀한 신분의 엘리자베스에게 '해적 여왕'이라는 험악한 칭호가 붙게 되었다. 당시의 해상무역과 해양 탐험은 해적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사략선(국왕의 비호 아래 적국의 배를 공격하고 포획했던 영국의 해적선)은 곧 전함이었기 때문이다. 해상무역을 통해 돈을 벌어들인 영국 정부는 합법적인 마피아나 다름없었으며, 왕실의 해군 또한 허가받은 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 항해는 여왕에게 엄청난 배당금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마젤란이 항해 중에 피살되었기 때문에 당시 해적 두목으로 명성을 날리던 잉글랜드의 드레이크가 살아서 세계 일주 항해를 완성한 최초의 항해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의 항해는 세계를 상대로 한 해적질이나 다름없었다.

 드레이크는 가히 해적사의 전설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범선을 타고 탐험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살인을 자행했다. 드레이크는 아주 냉정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 행동에 대해 수치심이나 죄책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의 항로는 아주 길었고, 그들이 활동하는 구역 또한 상당히 광범위했다. 그러다 보니 자국의 모든 상선을 보호하기에는 해군력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영국의 사략선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되었다.

 드레이크는 세계 일주 항해를 통해 엄청난 노획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 탈취한 재물만 해도 대략 50만 파운드에 달했고, 그 3분의 1 정도는 대주주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특히 여왕은 드레이크가 가져온 에메랄드를 자기 왕관에 박아 넣기도 했다.

 사략선에 약탈한 재물을 가득 싣고 드레이크가 잉글랜드로 귀환했을 때, 고귀한 영국 여왕은 친히 드레이크의 배 위에까지 올라가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이 원정 항해가 영국인의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워 주었기에 점점 더 많은 영국인이 앞다투어 해상 약탈과 무역 행렬에 나서게 되었다.

드레이크
프랜시스 드레이크

호킨스의 노예무역

 1562년부터 이미 잉글랜드는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다. 드레이크가 막 해적선의 선장이 되었을 무렵에 그의 친척이었던 존 호킨스는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선단은 아프리카에서 싼값에 노예를 사들여 스페인의 노예시장이었던 서인도 제도에 비싼 값으로 팔아넘겼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노예무역이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며 호킨스를 질책했다. 하지만 호킨스가 이 '사업'이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설득하자 결국 여왕도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그녀는 호킨스의 노예무역을 비호하면서 자본을 투자하는 한편, 그에게 선박과 선원을 제공하고 기사 작위까지 내렸다. 호킨스 경이 개척한 노예무역 항로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노예 삼각무역'의 시발점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호킨스의 노예무역을 허가함으로써 더 많은 영국 상인이 노예 매매 사업에 뛰어들었다. 왕실의 허가는 곧 이 사업의 합법화를 의미했다. 이 점에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1743-1826) 대통령은 같은 비판을 받고 있다. 도의적으로는 노예무역이 불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무역을 통해 직접적인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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