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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16_엘리자베스 1세 즉위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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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의 유년 시절은 이복언니였던 메리 여왕과 마찬가지로 불행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고, 어머니는 런던탑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몸에 맞는 옷조차 제대로 없을 정도로 소외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엘리자베스가 21세가 되던 해에 가톨릭교도였던 '피의 메리'는 신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런던탑에 가두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 그곳에서 비바람이 치는 밤,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밤새 숨죽여 울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1553~1603)로 왕위에 오른 후,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언니 메리처럼 포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지혜와 관용을 보여줌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여 현대 정치 문명의 귀감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558년부터 장장 45년에 걸쳐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녀의 치세 아래 잉글랜드는 피비린내 나는 종교박해를 멈추었고, 상공업과 해상무역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국력은 날로 강성해져 스페인의 '무적함대'까지 격파하였다. 이때부터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잉글랜드는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잉글랜드는 이 시기에 셰익스피어와 에드먼드 스펜서, 프랜시스 베이컨 등의 거성들이 등장하면서 문예부흥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역사학자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역사상 위대한 군주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만일 이 여왕이 없었다면 영국과 서방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1세와 영국의 종교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후 직면한 가장 민감한 사안은 바로 종교 문제였다. 신교도였던 그녀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신교가 영국 국교임을 선포했다. 이에 로마 교황 피우스(비오) 5세는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왕좌를 박탈한다고 공표했다. 더 나아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제거하는 것은 범죄라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가톨릭교도에게 보복을 행하지 않았다. 언니 메리 여왕의 악행으로 이미 충분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펼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다. 그것이 유일한 믿음인 한, 그 외의 것들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가톨릭교도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단지 유일한 '박해'라고 한다면 가톨릭교도들에게 화형대가 아닌 벌금을 물게 했을 따름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는 동안 잉글랜드에서 신교도와 구교도는 크게 충돌하지 않았다. 그들 간의 해묵은 갈등도 점차 해소되었고, 국가는 다시 통일된 모습으로 정비되어 갔다.

 이는 동시대에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던 종교개혁의 양상과는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대륙에서는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분쟁이 점차 야만적으로 변하여 '이단'으로 몰리면 가차 없이 화형대로 보내는 만행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종교적 충돌이 '30년 전쟁'이라는 종교전쟁을 유발하여 독일 국민의 4분의 1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독일의 통일은 200년이나 늦어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비단 종교정책에 있어서만 관용과 지혜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인으로서의 삶과 결혼까지도 국익을 얻기 위한 수단의 연장선에서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이용했다.


처녀 여왕을 둘러싼 비혼 찌라시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처녀 여왕(Virgin Queen)'으로 불리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결혼반지를 끼며 자신은 잉글랜드와 결혼하는 것이라 천명했다. 그녀에게 대관식은 곧 결혼식과도 같은 의미였다. 대관식 날,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신부 엘리자베스는 이후 결코 다른 남편을 섬기지 않았으며, 그 결혼반지를 낀 채 45년의 세월을 보냈다.

 왕실의 결혼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 1세는 왜 결혼하지 않았던 것일까? 혹자는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과 런던탑에 유폐되었던 기억이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를 죽인 사실 역시 엘리자베스의 마음속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이다.

 '피의 메리'라고 불리던 언니 메리 1세도 결혼 후 더욱 괴팍하고 악독한 사람으로 변했다. 이 모든 상황은 그녀에게 결혼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주었고, 결국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으로 결혼을 혐오하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한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로버트 더들리 백작을 사랑했지만 국민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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