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더 왕조의 왕권 강화
웨일스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수렁에 빠져 10여 년을 허우적대다가 결국 프랑스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후계자들은 장장 100년이 넘게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을 남겼다.
1453년에 백년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2년 만에 잉글랜드는 양대 귀족 가문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간의 내전에 휩싸였다. 이는 '장미전쟁'이라는 낭만적인 이름 때문에 자칫 여자나 애정에 얽힌 전쟁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장미 문장을 사용하는 두 가문이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30년에 걸친 내전 동안 잉글랜드의 왕관은 귀족들의 단두대라고 할 만큼 많은 희생을 치르며 네 명의 머리 위를 전전하게 되었다.
결국 왕관은 랭커스터 가문의 귀족인 헨리 튜더에게 돌아갔다. 그가 바로 헨리 7세(1457~1509)이다.
1485년 헨리가 즉위할 당시, 장미전쟁으로 인해 유력한 명문 귀족들은 멸문당한 데다 그나마 잉글랜드의 다른 귀족들도 왕위쟁탈전의 혼전 중에 역량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덕분에 튜더 왕조는 강력한 전제 왕조를 수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헨리 7세는 왕위에 오른 후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는 교역과 항해를 장려하는 한편, 국가 재정도 급속히 불려 나갔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후계자는 1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헨리 7세는 상업적인 감각이 탁월했으며 이재에도 매우 밝았다. 왕실의 수입이 늘어남에 따라 그는 더 이상 재정 문제로 의회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전제왕권 체제가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아직 중세의 암흑기가 물러나지 않았던 당시, 전제왕권의 강화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이는 유럽 각국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고 국내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봉건세력의 도전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특히 로마 교황청이 정신세계를 좌지우지하면서 세속적인 문제에까지 사사건건 개입하는 데 대항하기 위해서도 왕권 강화는 불가피했다.
이렇듯 왕권과 교권 간의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영국의 발전을 촉진할 전기가 마련되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
역사란 항상 우리에게 진지하거나 비극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희극적이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사건도 있다.
종교개혁은 아주 엄숙하고 고상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주도했던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고상하기는커녕 아주 통속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헨리 7세의 아들인 헨리 8세(1491~1547)의 삼각관계에서 야기된 갈등이 역사적 사건으로 비화하였기 때문이다. 이 삼각관계의 주인공인 헨리 8세는 원래 종교개혁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을 화형에 처했다. 심지어 화형에 쓸 장작이 모자라 가격이 폭등할 정도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는 직접 루터의 주장을 이단적인 사설이라고 공격하는 글을 써서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이에 루터는 헨리 8세를 가리켜 '왕관을 쓴 멍청한 참모장'이라고 비난했다.
사태가 희극적으로 돌변하게 된 것은 바로 여자 문제 때문이었다. 때로는 인간의 호르몬이 확고부동한 신앙과 싸워 이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이 그에 해당한다.
1527년, 헨리 8세는 왕비의 시녀인 앤 불린과 사랑에 빠져 캐서린 왕비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그 표면적인 이유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형수였던 캐서린과의 결혼이 불법이므로 이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6년을 끈질기게 기다려도 교황이 비준해 주지 않자 1533년,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포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공표했다. 결혼식에서 앤은 넓은 치마로 임신한 몸을 감출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캐서린 왕비는 왕궁에서 쫓겨나 딸인 메리 공주와도 만나지 못한 채 쓸쓸히 생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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