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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15_종교개혁 이후 1558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되다

by 티제이닷컴 2024.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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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와 영국의 종교개혁

 헨리 8세의 교황의 허가 없는 이혼에 대한 보복으로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해 버린다. 어제의 동지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버린 상황이 되었다. 헨리 8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내친김에 국왕이 곧 영국국교회(성공회의 모체)의 최고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했다. 다분히 희극적이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렇듯 국왕이 이혼 문제로 교권에 도전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는 마치 삼류작가가 쓴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하나님과 성서의 신성한 소명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났다. 그가 바로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머스 모어였다.

 모어는 헨리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국교회의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는 데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수석대법관에서 물러났다. 헨리 8세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몇 년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1535년, 불행하게도 모어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참수형에 처했다. 모어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죽음 앞에 의연했다. 심지어 집행관에게 "내 목은 아주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런던탑 문 앞에 내걸렸다. 이후 400년이 지난 1935년에 모어는 가톨릭교회의 성인 반열에 올랐다.

 이처럼 황당한 이유에서 출발한 종교개혁이었지만, 이는 영국 역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부터 교황은 하나님의 사도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종교나 세속 문제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권으로부터 잉글랜드의 주권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가톨릭과 국교회교도의 수많은 목숨을 대가로 한 결과였다.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의 여왕이 되다

 헨리 8세는 이 종교개혁을 통해 잉글랜드의 영적, 세속적 세계를 아우르는 최고 수장에 올랐을 뿐 아니라 원하던 대로 사랑하는 여인을 정식 왕비로 맞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재산으로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울 수 있게 됨으로써 상당한 실리도 챙겼다. 물론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 최대 수혜자는 바로 잉글랜드였다.

 하지만 새로운 결혼은 헨리가 정작 바라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두 번째 왕비가 된 앤도 공주(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됨)를 낳았다. 실망한 헨리는 앤 왕비를 냉대하기 시작했고, 결국 런던탑에 가둔 뒤 처형했다. 이제 국왕은 영국국교회의 최고 수장이었기에 결혼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어쨌든 헨리 8세는 모두 여섯 명의 왕비를 두었고, 가까스로 에드워드 왕자를 얻을 수 있었다.

 1547년, 20년 동안 교황과 여인들을 괴롭혔던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났다. 헨리 8세의 평생의 숙원이었던 에드워드 왕자는 애석하게도 왕위에 오른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요절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첫 번째 왕비 캐서린이 낳은 메리 공주가 왕위에 등극했다. 그녀가 바로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리게 된 메리 1세(1516~1558)이다.

 불행했던 유년 시절 때문인지 메리 여왕은 아주 괴팍하고 포악하게 변해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메리 여왕이 재위하는 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은 신교(영국국교회) 신봉자들을 화형대로 보낸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피의 메리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보드카와 토마토즙을 섞은 핏빛 칵테일에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558년, 메리 여왕이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런던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춤추고 노래하며 새로운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등극을 열렬히 환영했다.

블러디 메리 칵테일


영국의 종교개혁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교회는 구교(가톨릭)와 신교로 분리되었다. 영국은 본래 아주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는데, 3~4세대 사이에 완전히 신교 국가로 바뀌었다. 신교는 개인에게 강한 신앙의 힘을 부여하는데, 그 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즉, 하나님이 어디에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며,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따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신교의 중요성은 교회가 아닌 바로 개인의 믿음에 신앙의 역점을 둔 것이 구교와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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