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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12_영국 의회의 탄생 과정

by 티제이닷컴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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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의회의 탄생

 오늘날 영국의 소도시 옥스퍼드는 옥스퍼드 대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지만, 이 작은 소도시가 영국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258년, 헨리 3세는 시칠리아 원정에 필요한 군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옥스퍼드에서 대규모 의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헨리 3세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윽고 헨리 3세의 매부였던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무장한 7명의 귀족을 대동하고 궁정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헨리 3세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대신, 왕권을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된 '옥스퍼드 조례'에 조인할 것을 요구했다.

 국정개혁안인 이 '옥스퍼드 조례'에 따르면, "국왕은 15인의 귀족위원회에 국가권력을 넘겨주어야 하며, 이 위원회의 동의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 새로운 조직인 이 귀족위원회를 기존의 조직과 차별화하기 위해 새로운 명칭으로 부르도록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명칭이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Parliament(협의)'이며, 이후부터 영어에서 '의회'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옥스퍼드
옥스퍼드


시몽 의회

 1265년, 잉글랜드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 시몽은 국민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고 귀족과 성직자들 이외에도 기사와 각 자치시의 대표도 참가하게 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궁벽한 시골에 사는 가난한 기사와 시민들이 자비를 털어 먼 길을 오자니 고생은 차치하고라도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는 비용 또한 큰 부담이 되었다. 그 때문에 의회의 초청을 받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들이 런던을 오가며 쓰는 경비를 지방 관리들이 책임지기도 했다.

 이를 보면 초기에는 의회의 권한이 그리 크지 않았으며, 의원들의 발언도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영국 의원과는 다르게 당시 의원들은 남자를 여자로 바꾸고,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외에는 못 할 것이 없다고 큰소리를 쳐댔다. 심지어 국왕도 안중에 없었으며, 지역 간의 교통 문제 등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부가 재빨리 국회의원은 거주지와 런던을 오가는 교통비를 면제받는다는 조항을 명문화했기 때문에 지방의원이라고 하더라도 별로 문젯거리가 될 것이 없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의회는 영국에서 소집된 첫 번째 의회로 기록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시몽 의회'라고도 부른다. 오늘날 영국에 민주적인 대의제가 등장하게 된 데에는 이 시몽의 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영국의 정치체계가 가닥을 잡아갈 즈음에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쳤다. 의회와 국왕 간에 내전이 지속되던 와중에 시몽이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경의 포로로 잡힌 것이다. 시몽의 권력 독점을 시기한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에드워드는 의회군을 물리치고 시몽의 정치적, 물리적 생명이 달린 시몽 의회를 무산시켜 버렸다. 1265년 여름, 시몽은 국왕의 판결에 따라 에드워드 경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다.


에드워드 1세, 웨일스를 차지하다

 1272년, 헨리 3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경이 에드워드 1세(1239~1307)로 왕위에 올랐다. 부왕보다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지녔던 에드워드는 국왕의 자리에 잘 적응해 갔다. 그는 훌륭한 전략가였으며, 정치적으로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입법을 중시하여 보통법을 정착시킴으로써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로마대법전'을 완성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에드워드 1세의 또 다른 별칭은 '웨일스 정복자'이다. 그는 무력으로 웨일스를 잉글랜드의 영토로 편입했다. 웨일스인은 영토 협상 중에 웨일스 출신의 사람을 통치자로 임명해 달라고 요구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그들은 에드워드 1세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에드워드는 임신한 왕비를 비밀리에 웨일스로 보내 아이를 낳도록 했다. 그리고 왕자가 탄생하자 그 아이가 바로 웨일스를 다스릴 웨일스의 왕이라고 선포했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왕세자가 웨일스의 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당시 에드워드가 잉글랜드로 들여온 웨일스의 장궁은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영국군의 주 무기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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