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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영국

[영국]#28_영국내전의 끝, 의회는 승리하고 찰스 1세는 처형당하다

by 티제이닷컴 202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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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전, 왕당파 vs 의회파

 1642년 8월 22일, 결국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날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깃발을 높이 쳐들고, 국왕을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킨 의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장장 6년에 걸친 영국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승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의회의 군대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국왕의 지지자들은 모두 영국국교회의 수호자들이었고, 의회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청교도였다. 이 전쟁은 흡사 종교전쟁처럼 보였지만 전쟁의 근본 원인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라의 최고 권력을 누가 장악하는가의 문제였다. 국왕인가 의회인가.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결론은 명확해졌다. 의회파 군대가 마스턴 무어와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한 것이다. 참패를 당한 찰스 1세는 의회파 쪽으로 내전에 참가한 스코틀랜드 군대의 진지로 가서 보호를 요청했다.

 군인들에게 봉급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할 만큼 가난했던 찰스 1세는 크롬웰과 혁명의 열정으로 충만한 그의 군대에 참패당한 것도 모자라 적진과도 같은 곳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의 악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646년,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는 장기간에 걸친 협상 끝에 거래하기로 했다. 잉글랜드가 40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스코틀랜드로부터 찰스 1세의 신병을 넘겨받기로 한 것이다. 이 거래의 제물이 된 국왕은 자신을 사고파는 현실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전 중에 큰 공을 세운 군대는 정치권에서 더 큰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크롬웰의 위세와 권세는 날이 갈수록 등등해졌다. 하지만 영국 국민과 국왕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찰스 1세, 처형 당하다

 하원에서 올린 국왕의 신병 처리 안건이 상원에서 부결되자 군대와 시민의 지지를 받고 있던 하원의원들은 하나의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바로 "인민은 모든 권력의 근간이며, 인민이 선출한 대표가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갖는다. 하원에서 선포하거나 제정한 법안은 모두 법적 효력을 갖는다. 설사 법안이 국왕이나 상원의 승인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원칙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원은 이렇게 상원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국왕 처형을 위한 길을 터놓았다.

 당시 상인 계층이 국왕의 처형을 종용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찰스 1세는 세금을 징수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핍박받던 평민 계층도 찰스 1세의 처형을 원했다. 그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왕실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전쟁에서도 패했기 때문에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했다. 비참하게 포로 신세가 된 찰스 1세에게 처형 판결이 내려진 것은 어찌 보면 가혹한 일이라 할 수도 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 영국의 최고 통치자이자 존귀한 국왕의 신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크롬웰과 이 사건의 재판장인 브래드쇼에게 필요한 것은 정당한 판결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국왕의 목을 치는 것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목숨과 이득을 보장받기 어려울 터였다. 더욱이 분노로 광포해진 민중을 달래기 위해서는 피의 대가가 필요했다.

 그런데도 국왕을 처단하기 위한 결의안은 좀처럼 통과되지 못했다. 참다못한 군대는 직접 손을 쓰기로 작정했다. 1648년 12월 6일, 대담한 프라이드 대령의 지휘 아래 장로파 의원들을 의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프라이드는 마치 지각생을 벌하는 선생님처럼 명단을 들고 의회 문 앞을 지키고 섰다. 그리고 명단에 이름이 오른 장로파 의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이것이 유명한 '프라이드 숙청 사건'이다.

 이 숙청 작업이 마무리된 후 잔존한 의원들이 소집한 '잔부의회(장로파 의원을 추방하고 급진 청교도인 독립파 의원만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마침내 국왕에 관한 안건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일은 군인에게 정치 간섭의 빌미를 제공하는 선례를 남겼고, 크롬웰 독재 시대의 서막을 열어주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급조된 법정에서 찰스 1세는 이 재판의 합법성을 부정하며 당당하게 최후진술을 펼쳤다. 이 재판은 대부분의 법관이 결석한 채로 진행되었다. 도저히 정당하다고 볼 수 없는 국왕 재판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1648년 12월, 찰스 1세가 윈저성에 감금되어 있을 때 그는 시종들의 무례함을 한탄하며 "국왕의 권위를 우습게 여기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얼마 후에 일어났다. 국왕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찰스 1세는 최고 법정의 수장인 브래드쇼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여보게, 판결하게나.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네. 도대체 누가 공정한 판결을 기대라도 한단 말인가?"

 17세기 중엽에 영국 내전의 마침표를 찍은 이 전례 없는 국왕 처형 사건은 청교도혁명(1642~1651)이라고도 불리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그다지 박수받을 만큼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 혁명 전후로 20만 명의 생명이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전체 인구는 겨우 450만 명이었다.

프라이드 숙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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