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도시미치6 [일본 근현대사]#37_일본, 국외 영토를 탐내기 시작하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 진출해야 한다는 사상은 일본을 군국주의 침략 노선으로 인도했다. 그 후 일본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열강의 후발주자이자 아시아의 돌연변이로서 특유의 야만성과 흉포함으로 수많은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였으며, 수천만 아시아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일본의 피비린내 나는 흥성은 인류 역사에 치욕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는 그때 입은 상처가 오늘날까지도 모두 아물지 않아 여전히 일본을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게다가 일본이 지난 역사에 대해 애매하고 잘못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아시아 국가들과의 사이에 깊이 팬 심리적인 골이 메워지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탈아론 1885년, 일본 사상계의 아버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운영.. 2024. 1. 11. [일본 근현대사]#29_근대 천황제 확립, 메이지 유신 이토 히로부미는 제헌 대권을 장악하고, 점진적인 제헌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1882년에 독일을 방문해 1년 넘게 독일 헌법 제정을 연구한 바 있는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식 헌법 제정을 모델로 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하고는 "일본 천황의 이익 차원에서 본다면 국회 소집은 축하할 일이 아니오. 부득이하게 국회를 설립했다고 해도, 헌법에 정부의 예산은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할 필요는 없소. 선생은 국회가 예산을 비준하지 않을 경우의 해결책을 준비해 놓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는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는 일본 헌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유신 3걸, 오쿠보 도시미치 살해되다 1878년 5월 14일 새벽 6시, 오쿠보 도시.. 2024. 1. 5. [일본 근현대사]#18_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1)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와지 도시요시는 도쿄 경시청의 수뇌로서 가고시마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과거 유신의 영웅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에서 폭동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다. 세이난 전쟁 메이지 6년, 10월 정변이 일어난 후,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공직을 사퇴하고 메이지 정부를 떠났다. 메이지 유신 과정에 큰 공을 세운 그들이었지만 정부를 정한론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내치파와 대립하다가, 정부를 떠난 후에는 불평사족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개혁 방향은 사족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이 갈등은 훗날 세이난 전쟁으로 발발했다. 유신 원로들의 반란 1874년부터 몇몇 메이지 유신 원로들이 폭동을 일으키.. 2023. 12. 29. [일본 근현대사]#16_메이지유신의 군사력 확충, 징병제 도입 1872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부에 '군비 의견서'를 제출하고, 유럽의 군제를 본떠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1872년 말부터 1873년 초까지 사절단이 유럽을 시찰하고 있던 시기에 천황은 '징병조서'를 선포하고, 태정대신이 '징병고유'와 '징병령'을 발표했다. 또 1872년에는 육군과 해군을 두는 국제적인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구시대적인 분위기가 짙은 병부를 폐지하고 군대를 관리하는 육군성과 해군성을 설립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육군성 대보로, 막부에서 군대 총감을 역임한 가쓰 가이슈를 해군성 대보로 임명했다. 징병제는 육군을 복무 기간 3년의 상비군과 2년의 후비군, 국민군으로 분류해 입대자가 3년간 현역으로 복무한 뒤 제1 후비군과 제2 후비군으로 각각 2년씩 총 7년간 복무하도록 했으며.. 2023. 12. 28.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