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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44

[일본 근현대사]#59(마무리)_어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고백, '애매한 일본과 나' 오에 겐자부로의 고백 수상 소감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그 연설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매우 애매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난 26년 전 이 자리에 섰던 동포보다도 71년 전 수상자인 아일랜드의 대시인 예이츠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파괴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속에서 인류의 지혜를 수호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과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자엔지니어링 학과 자동차 생산 공정학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 우리나라의 문명을 위해 예이츠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한 파괴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이 우리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 사람들의 이성을 짓밟았다. 나는 바로 이러한 역사를 가진 국가의 국민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국의 역사로 인해 고통스러운 .. 2024. 1. 30.
[일본 근현대사]#57_세계 2위의 경제 대국, 그 거품이 터지다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이 되다 이케다 내각이 집권하던 1963년, 일본의 GDP는 676억 달러로 같은 시기 미국의 11.4퍼센트, 서독의 70퍼센트, 영국의 78퍼센트에 달했으며, 1966년까지 실질적인 경제 성장률이 13퍼센트를 기록해 일본은 전체 GNP 규모가 미국과 독일,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를 차지했다. 메이지 유신을 실시한 지 100년째 되던 1968년, 일본의 GNP가 서독을 앞질러 1위인 미국의 바로 뒤를 잇는 2위로 올라섰다. 당시 일본의 국민 소득은 여전히 세계 20위에 머물러 일본인들의 생활이 '세계 제2위 경제 대국'의 국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지만, 주요 산업의 국제 경쟁력은 매우 강했다. 일본 경제는 국민 경제의 활력과 고성장률, 낮은 실업률, 안정된 물가를 무기.. 2024. 1. 29.
[일본 근현대사]#55_국민 소득 배증 계획, 신칸센의 등장과 소비 인식 향상 국민 소득 배증 계획 1950년대 말, 도쿄의 한 식당에서 이케다 하야토와 몇몇 학자들이 정기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이케다 하야토의 싱크탱크인 '고치카이'의 주 1회 정기모임이었다.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 경제 정책을 주도해 온 주요 경제 관료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성을 주관하며 통산상과 경제심의청 장관을 역임했다. 바로 이때, 젊은 경제 전문가인 시모무라 오사무의 주장이 이케다 하야토의 관심을 끈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아직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시모무라 오사무는 일본 경제의 두 자릿수 성장을 예측했다. 이케다의 경제 자문인 다무라 빈고는 그를 이케다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정부 계획안에 명시할 숫자를 둘러싸고 시모무라와 다무라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시모무라는 11퍼.. 2024. 1. 27.
[일본 근현대사]#49_두 개의 원자폭탄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 1943년부터 일본은 일본 본도에서 쿠릴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지마, 마리아나 군도, 필리핀 군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및 인도양의 안다만 제도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의 바깥쪽에는 라바울, 솔로몬 섬 중부, 뉴기니섬 중부와 마셜 제도가 있었다. 미국의 진격, 밀리는 일본 일본은 중국군과 관동군, 조선군을 신속하게 태평양으로 파견했지만, 미국의 빠른 공격과 압도적인 자원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12월 말, 일본 해군은 솔로몬 군도에서 철수하였으며, 뉴기니에 있던 13만 일본군이 고립되었다. 일본은 마리아나 군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 6월, 미군의 대형 함대가 사이판으로 접근해 마리아나 군도에 있는 주요 일본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항공모함 9척과 .. 2024.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