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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4

[일본 근현대사]#54_한국전쟁과 샌프란시스코 조약 자동차 공업도 정부의 특별 지원 대상 산업이었다. 1949년,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자동차 생산 대수 제한 조치를 폐지했다. 당시 일본의 자동차 생산량은 연간 3만 대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그 후 닛산, 이스즈, 도요타, 히노 등 자동차 생산업체들이 거액을 투자해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해 향후 자동차 제조업의 현대화에 기초를 다진다. 1호기는 수입하고, 2호기 국산으로 일본의 합리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술 도입 방식이다. 일본은 거의 모든 기계 공업에 훗날 '1호기 수입, 2호기 국산'이라고 불린 방식이 적용되었다. 일본은 이 방식을 통해 국제적인 선진 기술을 최단 시간에 도입하고 개선해 외국 제품과 대등한 수준의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해 국제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자동차와 전자산업의 성.. 2024. 1. 27.
[일본 근현대사]#51_종전 후 미국의 일본 경제, 교육, 헌법에 대한 개입 신헌법에 의해 의회와 내각 그리고 지방 자치 제도에 대한 개혁도 기본적으로 이루어졌다. 재벌들은 해산하라, 미국의 경제 개입 경제 분야에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지탱하던 주요 기반으로서 기생하던 지주 토지 소유제를 개혁해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자경농 제도로 변모했다. 연합군 총사령부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외 확장에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던 재벌을 해산시켰다. 당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쓰다 등 10대 재벌이 소유한 기업의 총자산은 전체 기업 총자산의 35퍼센트, 금융자산의 53퍼센트, 중화학 공업의 49퍼센트를 차지했는데, 미국은 조사 보고서를 통해 "일본에서 재벌이 계속 존재한다면 이 나라는 곧 재벌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은 지주 회사를 해산시키고, 재벌 가족의 통치권을 취소한다... 2024. 1. 24.
[일본 근현대사]#46_일본의 만주사변과 중국의 국공합작 1931년 9월 18일, 중국 선양 북부 류탸오거우에서 관동군 독립수비대의 고모토 스에모리 중위가 사병 6명을 데리고 남만 철도 선로 위에 황색 폭약 42포를 설치했다. 얼마 후 굉음과 함께 철로가 폭파되었다. 이 일은 중국 군대를 모함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9.18 만주사변 얼마 후, 4킬로미터 밖에 매복해 있던 카와시마 타다시 대위가 중국 군대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는 일본군이 이미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규모 행동으로,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9월 19일, 안둥, 잉커우, 창춘, 펑황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장제스의 훈령에 따라 장쉐량은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자기들 목숨 부지하는 게 최우선이어서 도망가기 바빴다. 불과 4개월 동안 일본은 산해관.. 2024. 1. 17.
[일본 근현대사]#45_대공황과 군국주의 길을 걷는 일본 1921년, 미국 정부가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9개국을 초청해 워싱턴에서 회의를 열고, 일본에 강한 공세를 펼쳤다. 미국은 일본에 해군의 군비 확장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과 영국, 일본이 각각 5:5:3의 비율을 유지하기로 합의해, 일본 주력 군함의 규모는 영국과 미국보다 21만 톤 적은 31만 톤을 넘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 문제에 있어서 미국은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중국이 요구한 영사 재판권 취소와 관세 자유 실현, 조계지 반환 등의 요구와 산둥 문제 해결, 1915년에 체결된 21개조 요구 폐지 등의 조건은 일본이 배상금을 받고 산둥에서 철군하기로 합의하는 데 그쳤다.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동북아에 새로운 정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영일 .. 2024.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