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프랑스5

[프랑스]#8 프랑스에 새로운 종교바람이 불다 프랑스, 종교계의 새 바람이 불다  프랑스에는 16세기 초부터 종교계 내부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는 혁명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그 당시 종교계를 주도하던 가톨릭교는 자신들의 종교 교의, 계급제도 및 각종 번잡한 종교의식 등이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판단, 이미 시대에 도태된 개념이 되어 있었다. 시대는 신흥 자산계급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프랑스 최초의 신교는 루터파였다. 1520년대에 프랑스에는 이미 많은 수의 루터파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 신교의 절대다수로 칼뱅파가 자리를 잡게 된다. 일찍이 신학을 공부한 장 칼뱅(1509~1564)은 1533년에 신교로 개종하고, 그다음 해에 프랑스 정부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피신한 후 그.. 2025. 4. 10.
[프랑스]#7 백년전쟁 마무리 및 영국의 장궁에 관해 백년전쟁 마무리 20세기 초, 로마 교회는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꽃다운 스무 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화형 당한 소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짧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삶을 살며 조국인 프랑스를 지키고 프랑스에 배신당한 잔 다르크는 자신의 목숨을 영원한 명예와 맞바꾸었다. 당시 판사는 그녀에게 국왕의 대관식에서 왜 전장의 깃발을 올렸는지 물었다. 잔 다르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공이 있는 사람이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그녀의 영광이 바로 프랑스의 명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에게 잔 다르크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다. 잔 다르크의 가치에 대해서는 프랑스인보다 영.. 2025. 4. 8.
[프랑스]#5 백년전쟁, 프랑스의 구세주 잔 다르크의 등장 아쟁쿠르 전투, 프랑스의 패배 1415년,  오를레앙과 부르고뉴파의 세력 다툼으로 프랑스가 분열된 틈을 타서 영국 국왕인 헨리 5세는 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들의 군사는 1,000명의 보병과 기병 5,000명의 장궁병으로 조직되었다. 이때 프랑스는 군대는 3만 명을 넘는 규모긴 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다시 영국 장궁병들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 병사가 돌진할 때마다 영국 장궁병 한 명이 쏘는 화살은 다섯 발이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다섯 번만 쏘아도 5,000명의 장궁병이 쏜 화살은 2만 5,000발이 된다.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프랑스 병사들이 몇 번을 돌진했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화살의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후세 .. 2025. 4. 6.
[프랑스]#3 백년전쟁 : 중세 기사의 몰락, 에드워드 3세의 승리 그리고 흑사병 중세 기사의 몰락 중세 시대 유럽을 종횡하던 기사는 왜 몰락하게 됐을까? 에드워드 3세의 천재적인 전쟁 능력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 엥겔스가 한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장궁은 대단히 위협적인 무기였다. 이는 영국군이 크레시, 푸아투, 아쟁쿠르 등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엥겔스가 언급한 장궁은 사정거리가 거의 360미터에 달했고, 화살이 시위를 떠날 때의 속도는 초당 60미터 이상이었다. 250미터 밖에 있는 가죽이나 천만 아니라 80미터 이내에서 정면으로 공격할 경우에는 갑옷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50미터 내에서는 뚫지 못할 것이 없었다. 에드워드 1세의 종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182년, 애버게이브니 성을 공격할 때 웨일스.. 2024.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