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기사의 몰락
중세 시대 유럽을 종횡하던 기사는 왜 몰락하게 됐을까? 에드워드 3세의 천재적인 전쟁 능력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 엥겔스가 한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장궁은 대단히 위협적인 무기였다. 이는 영국군이 크레시, 푸아투, 아쟁쿠르 등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엥겔스가 언급한 장궁은 사정거리가 거의 360미터에 달했고, 화살이 시위를 떠날 때의 속도는 초당 60미터 이상이었다. 250미터 밖에 있는 가죽이나 천만 아니라 80미터 이내에서 정면으로 공격할 경우에는 갑옷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50미터 내에서는 뚫지 못할 것이 없었다.
에드워드 1세의 종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182년, 애버게이브니 성을 공격할 때 웨일스인들이 쏜 화살은 10센티미터 두께의 성문을 뚫었다. 장궁의 예리한 화살 앞에서는 갑옷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나무로 된 말안장을 뚫고 말 등에 꽂히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이 같은 장궁의 원거리 사정 능력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국의 위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술의 변화였다. 특별한 전술 없이 무작정 내달리기만 하는 프랑스 기사들은 정면에서 집중적으로 공격해 오는 영국군의 장창에 저지당했다. 우왕좌왕하는 프랑스 기사들은 영국군 진영 양측에 포진하고 있던 장궁병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기 일쑤였다. 프랑스군과 달리 영국군은 마치 작전에 따라 전투에 임하는 정규군처럼 보였다.
멋있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프랑스 기사들은 여성들에게는 호감의 대상이었지만, 강한 장창과 빠른 장궁으로 무장된 전쟁터에서 무거운 갑옷을 걸친 그들의 모습은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아무리 이전과 다름없는 용맹을 자랑하더라도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시대의 조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기사의 몰락은 군사상의 변혁과 정치, 경제적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영주제가 몰락함에 따라 토지 소유 및 활용 방식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영주들은 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농민들은 매년 정해진 수량을 소작료로 지주에게 화폐나 부역으로 갚았다. 이로써 과거의 영주와 농노는 지주와 소작농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농노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토지 점유 등급을 기초로 해서 상하의 권리와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전 시대의 봉건제는 와해하였고, 이와 함께 성장했던 기사 제도도 몰락했다. 또한 기사들은 규율과 조직성이 엄격히 요구되는 새로운 전쟁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와 더불어 국왕은 더 이상 봉토에 기대어 군인을 징병하고 군대를 조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병의 급료 등으로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에 따라 국왕은 더 이상 자신에게 속한 기사를 아무 때나 징집할 수 없는 까닭에 정규군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20년 정도 빨리 이러한 변화를 겪었다.
에드워드 3세의 승리
장궁의 예리한 화살은 영국에게 수많은 승리를 안겨 주었다.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군은 프랑스로 돌아가는 관문인 칼레항을 함락시킨 후에 특별한 투항 의식을 거행했다. 성안에서 나온 6명의 시민이 반나체로 목에 밧줄을 걸고 에드워드 3세를 향해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을 애원한 것이다. 이는 에드워드 3세의 요구에 따라 행해졌다. 그는 왜 이렇게 한 것일까? 당시 사람들은 반역자들을 이렇게 다루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기회를 빌려 사람들에게 자신이 비로소 진정한 프랑스 국왕임을 알리고자 이런 행동을 요구했다.
항복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여섯 명의 시민이 모자와 양말을 벗고 목에 밧줄을 묶은 채로 성에서 나와 성문 열쇠를 바친 후, 영국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때부터 칼레는 약 210년 동안 영국의 관할하에 놓이게 된다.
전쟁 초기 영국 용병들의 활약은 프랑스가 용병으로 구성된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용병은 국왕에게 충성을 다할 뿐 아니라 군대의 규율이나 훈련 방법 등에서 정규군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과 시민 연맹은 용병의 정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프랑스 국왕은 삼부회를 거치지 않고 징세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여 봉건 왕권은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득의양양해 있는 동안 그의 앞에 큰 재앙이 드리웠다. 이 재앙에 비하면 백년전쟁에서 영국의 승리냐 프랑스의 패배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죽음의 신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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