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백년전쟁에서는 프랑스 모직물 공업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지역과 관련한 분쟁이 도화선이 되었다. 모직물 공업이 매우 발달한 플랑드르 지역은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받았지만, 주요 원료는 영국으로부터 들여왔다. 따라서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대해 경제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이 지역으로의 양모 수출을 금지했다. 이로써 이미 온갖 모순이 교차해 있던 양국 관계는 이미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337년 5월 24일, 필리프 6세는 영국 관할지였던 기옌을 회수할 것을 선포했고, 영국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에드워드 3세는 스스로를 프랑스 국왕으로 칭하고,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되었고, 이는 백 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때 독일의 봉건 영주들은 영국 편에 섰고, 스코틀랜드와 로마 교황은 프랑스를 지지했다. 영국군은 주로 용병으로 조직되었고, 국왕이 지휘하는 주력 부대는 보병(궁병)과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반해, 프랑스군은 대부분 무장한 봉건 기사였다.
장궁의 위력과 봉건 기사의 몰락
전쟁이 시작되기 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멍청한 영국인들은 우리의 발아래서 죽어갈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시체로 뒤덮인 길을 만들 것이다." 프랑스 국왕이 이렇게 극도의 자신감을 보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국토 면적과 인구, 국력 등 여러 면에서 영국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과 교만, 그리고 전쟁에 대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은 프랑스를 패배로 몰아갔다.
1340년 6월,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병사들이 해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함 250척, 병사 2만 2,000명을 이끌고 라인강 하구의 프랑스 해군기지 슬로이스로 향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200척의 전함과 2만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슬로이스 항 근처에서 영국군을 맞이했다. 8시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프랑스 함대는 참패하여 약 180척의 전함을 잃었고, 사상자도 2만여 명에 달했다. 이는 거의 전멸이나 다름없는 수치였다. 영국군은 첫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향후 프랑스에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1346년 8월 26일, 영국과 프랑스는 크레시 부근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다. 1345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해 프랑스군의 포위와 추격에 완강히 저항하며 북상, 그해 크레시 부근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완만한 산비탈로 서고동저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오른편에는 하천, 왼편에는 숲, 그리고 산 정상에는 풍차가 있었다. 영국군의 규모는 1만 2,000명에서 1만 9,000명 정도였는데, 그중 대략 7,000명에서 1만 명이 장궁병이 되었다.
경계를 늦추고 있던 프랑스군은 공격 태세에 들어갔다. 이들은 1만 2,000명의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중 약 6,000명 정도는 제노바 출신의 용병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프랑스에 비극을 불러왔다. 프랑스군은 기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1시간 30분 동안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공격을 16차례나 감행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 사상자는 1만 5,000명에 이르렀지만, 영국군은 100여 명에 불과했다. 프랑스 측 사상자 중에는 전쟁을 지원하러 온 보헤미아 얀 왕과 롤랑 공작을 비롯해 기사 1,5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헤미아 얀 왕은 실명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유럽을 가로질러 프랑스를 지원하러 왔다. 프랑스가 패하자 얀 왕은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 양쪽에 두 필의 말을 묶도록 했다. 그러고는 우세를 점하고 있던 영국군 진영으로 돌진하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하나님께 감사드려라. 너희 중 누구도 보헤미아 국왕이 전쟁터에서 비겁했다고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가 전사하자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머리와 함께 다음과 같은 애도의 구절이 담긴 편지를 프랑스 측에 보냈다. "용맹한 무사 눈을 감다." 기사도의 최후는 이렇게 한 떨기 꽃처럼 장궁병의 화살에 떨어졌다. 백년전쟁은 군사적 측면에서 기사 제도가 몰락하는 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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