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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프랑스

[프랑스]#4 흑사병과 자크리의 난

by 티제이닷컴 2024.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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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유럽을 초토화하다

 1348년에 유럽 대륙에서 갑자기 고양이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원래 유럽에서 고양이는 주술과 악마를 연상시키는 동물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흑사병이 유럽 각지로 확산하는 상황에서 고양이가 흑사병을 옮기는 것으로 알려진 쥐를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흑사병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을 때 인구의 3분의 1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어떤 지역은 사망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기도 했다. 영국의 피해도 프랑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흑사병이 지나간 후에 노동력이 감소하고 병사의 수도 부족하여 영국도 전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흑사병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상인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중동으로 전해졌고, 다시 배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됐다고 한다. 또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흑사병은 당시 유럽 인구 중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갔고, 3세기가 지난 이후 다시 창궐했을 때는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흑사병과 전란이 가져온 피해로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그중 농민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의 방화, 살인, 약탈이었다. 특히 프랑스에 주둔한 영국군들은 약탈을 일삼았다. 그 결과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세자' 에드워드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프랑스 남부에서 약탈한 전리품은 1,000대의 마차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프랑스 귀족의 군대도 곳곳에서 악행을 일삼으며 센 강과 루아르 강 일대를 불모지로 만들었다. 퇴역한 사병들로 구성된 '강도단'이 종종 농촌 마을을 약탈했기 때문에, 많은 농장과 비옥한 토지는 풀이 무성한 폐허로 변해 짐승들이 출몰하기도 했다. 이 광경을 목격했던 한 선교사는 백년전쟁이 벌어진 지 20년 후의 프랑스 모습을 다음처럼 묘사했다. "포도밭은 황무지가 되었고, 논밭에는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목장에는 가축들이 보이지 않고, 불에 탄 교회와 가옥은 황량하기 그지없도다. 아직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프랑스는 초토화되었다. 행복했던 과거는 다시 안 오겠지. 그 푸르던 목장과 황금색으로 빛나던 들판은 지금은 폐허가 되었구나..."

 파리 같은 대도시는 부패한 타락의 도시로 변했다. 귀족들은 하루 종일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 있었고, 하층민들은 끼니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회 기풍이 날로 악화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30년 동안 천국에 갈 자격이 있는 이를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중세 프랑스 최대 농민 봉기, 자크리의 난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장 2세(1319~1364)와 귀족들이 흑세자 에드워드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석방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프랑스 농민과 상인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고, 프랑스는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마침내 1358년 2월 2일, 파리 시민들이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왕궁으로 진격했고, 장 2세의 아들 샤를 왕세자(훗날 샤를 5세)가 보는 앞에서 시종들을 살해했다. 이때는 농민들에게 봉기 외에는 별다른 출구가 없는 상황이었다.

 1358년 5월, 기욤 칼을 중심으로 뭉친 북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자크리의 난이라고 하는데, '자크리'란 농민들에게 가장 흔한 이름으로 '시골 촌뜨기'라는 뜻이었고, 당시 귀족들이 일반 농민을 부르던 말이기도 했다. 이 반란에 참여한 인원은 5,000명이 넘었고, 다른 지역의 농민들도 차례로 가담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귀족들을 죽였다. 그들은 '귀족들을 한 명도 남기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도 국왕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깃발에 국왕을 상징하는 백합 휘장이 그려져 있었다.

 국왕에 반기를 들었던 파리 상인 조합 시장 에티엔 마르셀은 한때 농민 반란을 지지하여 800명의 파리 반란군을 농민군에게 지원하기도 했다. 봉건 귀족들은 장 2세의 사위이자 스페인 나바라 왕국의 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1332~1387)를 파견하여 보베 지역의 난을 진압하게 했다. 카를로스 2세는 악인왕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협상을 미끼로 반란군의 대장이었던 칼을 유인해 살해했다. 반란군은 지휘관을 잃은 데다 내부 분열까지 생겨, 결국 봉건 귀족들에게 무참히 진압되었다.

 자크리의 난은 중세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농민 봉기로, 봉건 귀족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자크리의 난이 실패하자, 봉건 귀족들은 힘을 모아 파리를 공격했다. 1358년 7월 31일, 파리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마르셀이 사망했다. 8월 2일에는 샤를 왕세자가 이끄는 군대가 파리를 점령했다. 시민 정권은 전복되었고, 많은 시민이 죽임을 당해 파리의 시민 반란도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자크리의 난
자크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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